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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타라나키 전쟁(3월19일)

입력
2018.03.18 13:3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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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마오리 족과 대영 제국군대가 1861년 오늘, 1차 타라나키 전쟁 휴전에 합의했다. ancient-origins.net
뉴질랜드 마오리 족과 대영 제국군대가 1861년 오늘, 1차 타라나키 전쟁 휴전에 합의했다. ancient-origins.net

영국 역사는 1815년부터 약 100년간을 ‘제국의 세기’라 부른다. 막강 해군력으로 해외 식민지를 사실상 제패한 영국은 그 시기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향력 하에 포섭했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이 앞서 오스트레일리아에 터를 잡고 있던 영국에게 스스로 통치권을 양도하겠다며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한 것은 1840년이었다.

혈족 중심의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근 800년 동안, 고만고만한 전투력으로 서로의 토지를 뺏고 빼앗기며 지내던 마오리족에게 19세기 제국주의의 오세아니아 침탈은 섬뜩한 위협이었다. 노골적인 토지 약탈과 매매 분쟁이 잇따랐다. 호주 터닦기를 매듭지어가던 1830년대 영국은 뉴질랜드 협회를 설립, 조직적인 백인 이주 사업을 전개했다. 북섬 마오리족 추장 46명이 호주 총독을 통해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수용해달라고 청원한 것은, 최강국의 힘을 빌려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막기 위해서였다. 조약에는 39명의 반대자를 제외한 500여명의 마오리족 추장이 동의했다. 영국이 뉴질랜드 주권을 양도받는 대신 원주민의 영국 시민권과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토지 매각을 원할 경우 영국 정부가 매입 우선권을 갖는다는, 파격적인 친식민지적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미 방대한 호주 땅을 보유한 까닭도 컸다. 조약을 계기로 마오리 부족들의 연대 움직임도 시작됐다. 이른바 ‘마오리 킹 운동(Maori King Movement)’이다.

‘타라나키(Taranaki) 전쟁’ 혹은 ‘마오리 전쟁’이라 불리는 마오리족과 영국 군의 첫 전쟁이 1860년 3월 시작됐다. 항구와 가까운 북섬 뉴플리머스 북동쪽 와이타라의 토지 2.4㎢에 이주민 정착촌을 건설하려던 뉴질랜드 총독과, 조약을 근거로 토지 매각에 반대하던 부족 간의 전쟁. 호주 주둔군 3,500여명과 백인 자경대 등 5,000여명과 두 마오리 부족 1,600여 명이 맞섰다. 1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영국은 238명이 전사했고, 마오리 족은 200여명이 숨졌다. 1861년 3월 19일 양측은 별도의 조약 없이 휴전에 합의, 전쟁을 끝냈다. 마오리족은 3분의 1의 병력으로 최강 제국군대와 대등하게 맞섬으로써 토지 주권을 지켰다. 2년 뒤 시작된 2차 전쟁과 이후의 양상은 물론 달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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