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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국 여자들이 강한 이유

입력
2016.08.0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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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양궁 장혜진, 최미선, 기보배(왼쪽부터) 선수가 7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 마라카낭 삼보드로무 양궁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양궁 단체전 시상식에서 금메달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자 양궁 장혜진, 최미선, 기보배(왼쪽부터) 선수가 7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 마라카낭 삼보드로무 양궁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양궁 단체전 시상식에서 금메달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자 양궁의 올림픽 8연패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동이(東夷)’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중국 역사책에 등장하는 이 말은 한반도 방향인 동쪽 이민족을 뜻하는데, 공교롭게도 글자에 ‘궁(弓)’이 들어 있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활을 잘 쏘았구나 라고 넘겨 짚을 만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삼국사기에는 비류국 왕 송양과 한 판 붙은 주몽의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가, 태조실록에는 이에 못잖게 뛰어난 이성계의 활 실력을 증거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중국은 창, 일본은 칼, 조선은 활이라는 얘기와 함께 중국이 조선에 미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로 무사의 활 솜씨를 들고 있다.

‘동이’는 한자를 풀이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옥편은 ‘이(夷)’가 ‘대(大)’와 ‘궁(弓)’에서 온 것이라면서도 ‘궁’의 뜻을 따로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둘을 합쳐 ‘사람’이라는 뜻을 담았다고만 했다. 가장 권위를 인정 받는 청대 단옥재의 설문해자 주석서에서도 ‘동이’를 ‘대인’이나 ‘군자’의 뜻을 담았다고 했지 활 잘 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지 않았다. ‘동이’하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말 타고 활 쏘는 모습을 얼른 떠올리는데, 그러고 보면 사냥에 활을 사용하지 않는 문화가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동이의 활 실력이 유전이라고 하면 올림픽 금메달의 기쁨이 전국민적으로 배가되는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러지 않더라도 8연패의 요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여러 언론이 양궁이 협회의 지원으로 유일하게 사교육 없는 올림픽 종목이라는 점, 국가대표가 되려면 8개월에 걸친 훈련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철저하게 규정에 따른 결과를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점 등을 한국 여자 양궁이 갖는 독보적인 실력의 비결로 들고 있다. 잘 갖춰진 ‘시스템’의 승리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1988년 양궁 단체전 도입 첫 해에 금메달을 따내고 이어 계속 금메달을 놓치지 않은 선배들의 빛나는 전통이 안겨 주는 압박 같은 것이 한국 여자 양궁계 전반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전통의 무게가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여자 궁사들은 그 중압감을 과녁을 향한 무서운 집중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양궁 못지 않게 세계 무대에서 한국 여성의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 받는 스포츠 종목이 있다. 골프다. 그런데 그 골프에서도 선배가 만들어 놓은 훌륭한 전통에 자극 받고 이를 모델 삼아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아 더 멋진 선수가 되는 후배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전통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박세리다.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ESPN은 지난 달 박세리 은퇴에 맞춰 내놓은 칼럼에서 “1998년 박세리가 신인으로 LPGA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뒤 한국에서 골프는 엄청나게 달라진 위상을 갖게 됐다”고 썼다. 이번 올림픽 대표팀에 포함된 전인지는 이 매체와 인터뷰에서 “박세리는 모든 한국 선수들의 영웅”이라며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은 많은 주니어 선수들에게 동기 부여가 됐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전통의 위력을 증언했다. 심지어 1998년 박세리와 함께 투어 신인이었다가 후에 LPGA 이사회 의장까지 지낸 미국 선수 헤더 델리 도노프리오는 “박세리는 한국에만 영향을 준 게 아니라 태국, 일본, 중국 선수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할 정도다.

스포츠를 빌려 크든 작든 좋은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전통을 세우려면 얼마간의 재능은 불가결할 것이다. 지혜가 남달라야 할 수도 있고 용기와 결단력이 요구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터이다. 선배들의 그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일 때라야 사회는 퇴보하지 않고 느리게나마 한 걸음씩 전진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좋은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김범수 문화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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