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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반기문의 퇴주잔

입력
2017.01.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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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넓은 끝을 깨서 먹느냐, 좁은 끝을 깨서 먹느냐를 두고 전쟁까지 벌이는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얘기가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라는 건 널리 알려진 바다. 그건 정치와 인간에 대한 신랄한 풍자였다. 토리당과 휘그당이 성공회와 가톨릭 등 교회의 공허한 교리논쟁에 얽혀 사생결단의 정쟁을 벌이던 18세기 영국. 당시 정치에서 지독한 환멸을 맛 본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풍자를 통해 정치적 갈등이 때로 얼마나 허황된 명분에 근거하는지, 정적(政敵)에 대한 공격이 얼마나 맹목적인지를 통렬하게 야유했다.

▦ 어리석음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실재했다. 조선 현종 때의 ‘예송논쟁’만 해도 그렇다.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 죽고, 나중에 효종비까지 죽었다. 그러자 효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가 아들과 며느리의 상에 각각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사생결단의 당파싸움이 두 차례나 빚어졌다. 1년이니 3년이니, 서인과 남인이 핏대를 올리며 싸우다 끝내 피바람을 불렀다. 예법은 그저 싸우고 상대를 죽이기 위한 맹목적 빌미였을 뿐이다.

▦ 수백 년 전 예송논쟁이 최근 뜬금없이 다시 불거졌다. 대권 도전에 나선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겨냥해서다. 선영을 찾은 그가 퇴주잔을 받아 담긴 술을 덥석 마시는 영상이 나돌았단다. 악의적으로 왜곡 편집된 것이었다. 그걸 두고 민주당 중진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진위 확인도 없이 “전통예법도 모르는 사람이 대선 출마라니…”하는 식의 시비를 부풀렸다. 요즘 반기문에 집중된 네거티브 공세를 보면 달걀전쟁이나 예송논쟁이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 1년여 전만 해도 반기문은 국민 다수에게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대선 행보를 시작하자 졸지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은덕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편협한 손가락질부터 시작됐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엔 “젊은이들의 눈물을 외면한다”며 욕을 해댔다. 일거수일투족이 헐뜯기고 있다. 반기문이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굶주린 하이에나 떼처럼 사람을 물어뜯어 단숨에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선거판의 싸구려 선동이, 이젠 정말 넌더리가 난다.

장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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