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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지도자에 대한 역사의 경고, “무일(無逸)하라!”

입력
2017.05.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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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태종은 즉위 첫해인 1401년 윤3월 11일 정전(正殿)을 고쳐 짓고서 더불어 궁궐의 북쪽에 정자 하나를 지은 다음 총애하는 신하이자 학식이 뛰어난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에게 궁궐과 이름을 짓게 했다. 이에 두 사람은 청화(淸和), 요산(樂山), 무일(無逸) 세 가지를 후보로 올렸다.

청화는 맑고 온화한 정치를 해달라는 기대를 담은 것이다. 요산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한다고 한 데서 온 것으로 태종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달라는 소망을 드러낸 것이다. 무일은 <서경(書經)>에서 따온 것으로 안일함이나 게으름에 젖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게으름이란 몸의 게으름뿐만 아니라 마음의 게으름도 함께 포함한다.

태종은 그 중에서 무일을 골라 정전의 이름으로 삼았다. 정전이란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勤政殿)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어 청화를 골라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래서 태종은 무일전(無逸殿)에서 주요 정사를 다루었다.

원래 무일은 주나라 때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다가 마치고 나서 조카인 성왕(成王)에게 전권을 넘겨주면서 경계해야 할 딱 한 마디로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아 쓴 글의 제목이다. 그런데 군주가 게으르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진실로 안다면 군주는 게으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공은 “군주는 늘 무일(無逸)을 마음 한 가운데 오랫동안 두어야 합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무일 못지않게 중요한 말이 “오랫동안”이다. 잠깐 하다가 말면 무일 한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으로 시종일관할 때라야 제대로 된 군주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당나라 때 명신(名臣) 위징(魏徵)이 당 태종에게 올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종에게 열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내용을 간언하는 상소라는 뜻이다. 그 중에 무일(無逸)과 관련된 부분이 흥미롭고 상세하다.

“처음에 시작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나태하고 게을러질까 두려울 때는 반드시 일의 시작을 신중히 하고 일의 끝을 잘 삼가야 한다(愼始而敬終)는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시경종(愼始敬終)은 작은 조직이건 큰 조직이건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경구라 할 수 있다.

다시 조선 초로 돌아가자. 적어도 정치력만 놓고 보면 태종이 세종보다 몇 수 위다. 태종은 신시경종(愼始敬終)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군주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양녕을 세자에서 내쫓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다음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어린 세종이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4년 동안 돌보아 준 일이다. 세종의 경우에 이 ‘인턴 임금 4년’이 없었더라면 그 후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반면 세종은 신시(愼始)했는지는 몰라도 경종(敬終)했다고는 할 수 없다. 후계구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수양과 안평 두 대군으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련된 심부름을 하도록 해 정치 관여의 길을 열어주었다. 양녕이 세자이던 시절 효령이나 충녕이 정치와 관련된 책을 보면 그 자리에서 빼앗았던 태종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결국 세종 사후에 친형제들 간에 살육전이 벌어진 것도 실은 세종 탓이라 할 수 있다.

신시(愼始)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명확하게 경종(敬終)에 실패한 대통령을 보아야 했던 우리 국민으로서는 이제 신시경종(愼始敬終)하는 대통령을 꼭 좀 보았으면 한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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