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소설가

등록 : 2017.04.20 13:22
수정 : 2017.04.20 13:22

[장강명 칼럼] 왜 과학을 가르쳐야 하는가

등록 : 2017.04.20 13:22
수정 : 2017.04.20 13:22

오늘(21일)은 과학의 날이다. 달력의 기운을 빌어, 세계적 석학의 견해에 토를 다는 만용을 부려볼까 한다.

과학의 신이 계시다면 가호해주시기를.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 얘기다. 최근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는 “수학과 과학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인 ‘감정 지능’을 가르치자”고 주장했다. 기사의 다른 부분에서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지만, 방금 언급한 대목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하라리 교수의 말이 ‘개별 과목보다 통합 교육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면 조건부로 찬성하지만, ‘과학 연구는 인공지능이 더 잘할 테니까 우리 아이들에게는 다른 걸…’이라면 딱 잘라 반대다.

우선 인간보다 과학 연구를 더 잘할 인공지능의 등장을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다. 우리가 그런 미래를 택할 수도,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선택과 통제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훌륭한 과학자가 될 것인지, 기술 혁신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와는 관계없다. 시인이나 화가가 되려는 아이에게도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시민사회라는 섬세한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시민이 있어야 제대로 작동하는데, 과학적 태도는 시민이 꼭 지녀야 할 덕성이다. 윤리감각이나 역사의식과 동급이다.

과학적 태도란 무엇인가. 듣기에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라도 실험을 통해 입증되기 전까지는 전폭적인 지지를 미루는 건강한 회의주의다. 서로 다른 설명이 맞설 때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절차에 따라 어떤 가설이 더 설득력 있는지 가리고 거기에 합의할 수 있다는, 진보와 평화에 대한 믿음이다. 그 검증 과정에서 자존심과 진영논리, 때로는 정의감조차 내치는 엄격함과,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겸손함이다. 어제 작동했던 법칙이 오늘도 작동하고,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 너에게도 작용한다는 일관성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기반성능력이다.

이런 자세는 인간 본성과는 거리가 멀며,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극히 부족한 능력이기도 하다. 만병통치약 파는 약장수 얘기와 별 다를 것 없는 ‘분석’이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종종 언론기사도 그 수준으로 떨어진다. 실험군과 대조군 개념만 알아도 물리칠 수 있을 상술, 무속, 사이비 교리, 음모론에 끊임없이 희생자가 생긴다. 죽은 비유로 치장한 정신승리에 환호하는 사람은 또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쳐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공동체를 이루는 정신의 기반을 알려주고 공유하기 위해서다. 기술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 얘기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왜 가르치는가. 1648년이라는 연도를 외우게 하려고? 아니다. 지금의 국제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려주는 동시에 톨레랑스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지옥불에 떨어질 불신자들을 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집에서 듣는 아이에게,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세속사회에 살고 있다”고 교실에서 선을 그어주기 위해서다.

나는 베스트팔렌 조약 못지않게 에너지 보존법칙이 현대사회의 커다란 사상적 기초이며, 현대인의 가치관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고 본다. 진화론이 지금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철학적 영향력은 중국 고대사상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걸 어설프게 알면 우생학, 약육강식, 사회진화론 같은 괴상한 논리에 빠진다. 그러니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셋째로 과학기술이 지금 우리에게 중대하고 현실적인 위협이기 때문에 가르쳐야 한다. 2003년 정부가 전북 부안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지으려 하자 전쟁을 방불케 하는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2년 뒤 경주에서는 주민 89.5%가 그 시설을 짓는 데 찬성했다. 부안과 가까운 군산에서도 찬성률이 84.4%였다. 내게는 2003년도, 2005년도 모두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걸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고 부를 순 없다.

행정이, 홍보가 문제였나. 물론 그랬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는 양극단의 ‘전문가’들에게 판단을 기대야 했던 지역시민사회의 역량 부족 문제가 있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핵물리학 기초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공학, 탄소순환, 정보처리도 기초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정해야 하므로.

한국에도 좋은 과학교양서와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저술가들이 점점 많아진다. 반가운 현상이다. 다만 간혹 그 중 어떤 학자들이 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로 “과학은 재미있으니까, 자연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니까”라고 답하는 모습을 볼 때면 살짝 쓴웃음이 나온다. ‘선생님은 그러셨겠죠’ 싶어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과학을 재미없어 한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을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재미있느냐고 묻던가? 우리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에 꼭 필요한 지식이라서 가르치는 것 아니던가? 내 생각엔 과학도 마찬가지다. 지금보다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의 절대량과 영향력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커지는 중이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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