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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변신에 노력한 유교, 한국 민주화에 영향 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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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변신에 노력한 유교, 한국 민주화에 영향 끼쳐”

입력
2017.04.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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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던 유교가 3ㆍ1운동 이후 되살아나며

위정척사 등 실패 인정하고 근대국가로 눈돌려

우리가 잘 모르는 유교의 얼굴 보여주려 출간”

1960년 4월 25일, 교수단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행진 중이다. 이황직 숙명여대 교수는 이 시위를 주도한 임창순(성균관대), 권오돈(연세대), 이상은(고려대) 등이 유교계열 학자라는 점에 주목, 유교 지식인들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0년 4월 25일, 교수단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행진 중이다. 이황직 숙명여대 교수는 이 시위를 주도한 임창순(성균관대), 권오돈(연세대), 이상은(고려대) 등이 유교계열 학자라는 점에 주목, 유교 지식인들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군자들의 행진

이황직 지음

아카넷 발생ㆍ696쪽ㆍ2만8,000원

‘응답하라 1988’의 흥미 요소가 ‘남편 찾기 놀이’였다면, 대선의 포인트는 ‘성왕(聖王) 찾기 놀이’다. 민주공화국 시대에 모든 것을 한 큐에 해결하는 구원의 성왕을 기대하는 심리란,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거꾸로 ‘성왕’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원동력이라면?

그런 점에서 이황직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의 ‘군자들의 행진’은 김상준 경희대 교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 이어 읽어볼 만한 작업이다.

김 교수가 주목하는 건 유교가 내세우는 ‘성왕(聖王)’ 이데올로기의 효과다. 현실의 왕은 절대 성왕일 수 없다. 그렇기에 성왕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왕을 노골적인 비판과 견제에 노출시키고, 결국 왕의 현실권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든다. 그 텅 빈 절대권력의 자리를 대신 메운 것이 근대의 인민권력이었다. 상극관계인 유교와 민주주의는 그렇게 만난다. 막스 베버를 빌리자면 ‘유교와 민주주의간 선택적 친화력’이다. ‘천민 자본주의’를 ‘유교 자본주의’라 합리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이런 관점 위에 서 있기에 김 교수의 ‘농민혁명이냐, 근왕운동이냐’는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진보ㆍ보수 해석 논란에서 제3의 입장을 취한다. “동학혁명이 직접 왕을 겨냥하지 않았고 왕의 목을 치지 않았다고, 공화제를 내걸지 않았다 하여 봉건적이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우습다. 17세기 영국 혁명에서도 대부분의 봉기세력들은 왕을 위한 반대를 내세웠다.”

‘군자들의 행진’은 동학운동쯤에서 멈춘 이 논의를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에까지 연장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시도다. 더구나 김 교수의 작업이 ‘사상’ 차원의 분석이라면, 이황직 교수의 작업은 구체적 인물과 사건을 파고드는 ‘역사’ 차원의 분석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황직 교수는 한국 현대사에 영향력을 끼친 유교계열 지식인들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했다. 아카넷 제공
이황직 교수는 한국 현대사에 영향력을 끼친 유교계열 지식인들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했다. 아카넷 제공

얼개는 이렇다. 유교는 조선이 망하면서 함께 망했다. 그러나 3ㆍ1운동 이후 유교의 지도급 인사들이 ‘파리장서운동’을 벌이면서 부활했다. 조선을 지키려던 유교가 위정척사운동, 의병투쟁의 실패를 인정하고 근대국가 건설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파리장서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유교 인맥은 광복 이후 정부수립 단계는 물론, 4ㆍ19혁명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못지 않게, 유교적 우환(憂患)의식ㆍ정명론(正名論)ㆍ폭군방벌론(暴君放伐論)이 4ㆍ19혁명에 크게 작용했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자신의 작업을 “우리가 잘 모르는 우리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작업을 “가장 보수적이기에 가장 진보적이라는 역설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군자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은 청교도혁명이 ‘성자들의 혁명’이라 불리는데 대응하기 위해 지었다. 아래는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군자들의 행진' 펴낸 이황직 교수는 “유교가 가장 보수적이기에 가장 진보적일 수 있었다는 역설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군자들의 행진' 펴낸 이황직 교수는 “유교가 가장 보수적이기에 가장 진보적일 수 있었다는 역설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87학번인데다 사회학으로 석ㆍ박사를 했다. 척 봐도 유교하고 안 어울린다.

“당연히 대학 땐 유교를 부정했다. 하하하. 시위하기도 바빴고, 그 때야 당연히 헤겔이나 맑스를 좋아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IMF위기가 터졌을 때 정실자본주의 어쩌고 하면서 모든 게 유교 탓이라고 하는데 동의하기 어려웠다. 오직 유교만이 원흉인가. 그래서 박사논문 주제를 정인보와 함석헌의 비교로 잡았고, 정인보를 파고 들면서 유교를 깊이 들여다봤다. 결론은 한국의 근대는 윤리적 노력에 의한, 일종의 도덕적 근대였다는 점이다.”

-유교를 옹호하는 순간, 당신 혹시 무슨 가문 몇 대손 아니냐는 의심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 소리 가끔 듣는다. 하지만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교에 대해선 예전엔 비난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예 무관심이다. 이미 죽어서 해가 없는 단계랄까.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비록 몰락한 양반가였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늘 단정하셨고, 언제나 불의와 도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런 지사적 풍모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연구에는 ‘동양 안에서 서양의 근대적 요소 찾기의 반복’이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그런 비판이 많긴 하다. 그렇기에 이번엔 철저히 경험적인 연구를 하자고 결심했고 6년간 노력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나 스스로도 유교가 스스로 근대로 갈 수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근대는 철저히 외부에서 온 것이다. 유교는 거기에 맞춰 엄청난 자기변신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점이다. 오늘날 유교 내 개혁세력이라 추앙받는 북학파는 오히려 근대화 과정에서 친일이니 뭐니 하면서 다 사라졌다. 반대로 꼬장꼬장하니 ‘위정척사’를 고집했던 이들은 근대 민족운동에 눈을 뜨면서 더 한층 치열하게 싸웠고, 후대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제도로서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민주화’를 구분한 뒤 유교는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해뒀다.

“유교와 민주주의는 분명 모순적이다. 유교엔 신분제적 요소가 엄존하고 개인 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에선 문제가 많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라는 정치변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유교의 도덕정치가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 면에서는 민주화에 긍정적 기여를 했다고 본다.”

-대선 같은 큰 정치적 이벤트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게 대의(大義)니, 공(公)이니 하는 지극히 유교적인 언어들이다.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1차 언어나 언어자원이 아직은 유교식 정치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신의 도덕성, 정당성을 대중들에게 어필하는데 유교식 어법 이상을 찾기 어렵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가장 보수적인 자원에서 가장 진보적인 언어가 나온다는 아이러니가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유교의 ‘왕도정치’가 공화주의와 어떻게 결합하느냐는 대목이 재미있다.”

-유교와 민주화에 이어, 유교와 민주주의 연구로도 이어질 수 있는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 전체 차원으로 보고 싶다. 우리나라에 이어 대만도 민주주의로 접어들었다. 중국과 베트남 역시 지금은 일당독재 형식이지만 언젠가 터닝포인트를 겪으리라 본다. 지금 중국은 마오주의를 약화시킨 뒤 옛 유교의 권위주의적 측면을 결합시키고 있지만, 유교의 저항적 측면이 언젠가를 발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 유교를 높이 평가하는 미야지마 히로시 전 도쿄대 교수는 유교를 둘러싼 갑론을박에 대해 “낡아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극복되지 못해서”라고 정리한 바 있다. 내부적 극복을 위해서라면 아직은 더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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