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등록 : 2017.12.16 04:40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영혼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 그들은 좀비인가?

<40> 좀비 영화의 아버지 조지 로메로

등록 : 2017.12.16 04:40

#1

68년 ‘살아있는 시체…’ 성공 후

아류작 쏟아지며 컬트장르 형성

좀비라는 이름 처음 사용한 감독

주술 벗어나 사회풍자 의미 획득

#2

‘레지던트 이블’ 등 수작 잇따르며

생물재난, 좀비묵시록으로 확장

‘부산행’으로 한국서도 주류로

인간 통제력에 대한 기대도 담겨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좀비 영화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원조로 삼고 있다.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이 잡아먹히는 새로운 유형의 공포가 여기서 시작됐다.

1968년 가을 미국 피츠버그에서 개봉된 흑백영화 한 편이 대중문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 전까지 공포영화는 괴물이나 악당이 등장해서 심리적, 정서적 긴장을 유발하는데 주로 초점을 맞췄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산 채로 잡아먹히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연령별 관람등급제가 시행되기 전이어서 객석에 있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해피엔딩도 아니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남은 주인공이 충격적인 최후를 맞으면서 끝났다. 사실 여러 배급사들이 재촬영과 결말의 수정을 요구했지만, 감독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원작 그대로 상영하는 조건을 수락한 회사에 필름을 맡겼다. 바로 이 작품이 오늘날 모든 좀비물의 원조인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좀비 영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감독 조지 로메로의 첫 장편 연출작이었다.

영혼이 없는 인간, 좀비의 탄생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등장인물들은 좀비떼에 쫓기다가 한 집에 모여든다. 필사적으로 탈출할 길을 모색하지만 이런저런 시도 끝에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방송에서는 금성에 갔다 돌아 온 우주탐사선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하면서 폭발을 일으켰고 그 때 정체불명의 방사선이 방출되었다며 그 뒤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괴물이 된다고 알린다. 좀비가 되어버린 딸이 아버지를 잡아먹는 등 끔찍한 일들이 이어진 끝에 주인공 혼자 남는다. 그는 창고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 나오는데, 밖에서는 민병대가 머리에 총을 쏘는 방식으로 좀비들을 퇴치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좀비로 오인되어 민병대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다.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주인공은 흑인 남성이었다. 당시에는 흑인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는 일 자체도 거의 없었지만 마지막에 허무한 죽음을 맞는 장면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다.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백인이었고, 마지막에 그를 죽이는 사람도 백인이었다. 이런 설정을 놓고 인종차별이 아직 노골적으로 남아있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은유했다는 평도 잇달았다. 정작 로메로 감독 본인은 ‘흑인 배우가 오디션에서 가장 연기를 잘해서 주인공으로 삼았을 뿐’이라고 밝혔지만 그와 무관하게 영화의 설정들은 관객과 평론가들의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로메로 감독의 시리즈 좀비영화 중 하나인 '시체들의 새벽'(1978). 쇼핑몰에서 배회하는 좀비들이 소비에 중독된 현대인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조지 로메로 감독은 그 뒤로 ‘살아있는 시체’ 시리즈를 계속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 1978년에 발표한 영화 ‘시체들의 새벽’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가 ‘작가 감독’으로서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좀비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작품에서부터이다. ‘시체들의 새벽’에서는 거대한 쇼핑몰을 배회하는 좀비 군상의 모습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들은 살아생전의 욕구를 여전히 좇는 듯 쇼핑카트를 끌며 상품들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평론가들은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소비에 중독된 현대인들의 실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좀비 그 자체가 영혼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으로 해석되는 것은 로메로 감독이 연출한 일련의 좀비 영화들에 결정적으로 힘입은 것이다.

좀비의 기원과 확장, 장르의 완성

좀비는 원래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산 사람을 약물로 중독시켜 가사상태로 만든 뒤 노예로 부린다는 일종의 생화학적 주술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메로 감독 이전에도 좀비와 비슷한 괴물이 나오는 영화들이 있었으나 SF와는 거리가 먼 판타지 공포물이었으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처럼 충격적인 묘사나 사회성 짙은 설정도 없었다. 동양에서는 좀비와 비슷한 강시가 있는데, 딱딱하게 굳은 시체이고 부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점 등에서 좀비와는 좀 다른 양태를 보인다.

저예산 흑백 독립영화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아류작들이 쏟아졌고 마침내 좀비물은 독자적인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다양한 좀비 영화들이 나왔는데 작품성이나 완성도는 대부분 아쉬운 수준이었지만 좀비물을 찾는 일군의 열광적인 팬들을 낳으며 이 분야가 하나의 ‘컬트 장르’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21세기 들어서 좀비 장르는 호평 받는 수작이나 상업적 흥행작들을 잇달아 배출한다.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한 영국산 좀비 영화 ‘28일 후’(2002)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색다른 설정으로 주제의 풍자성을 살렸으며 성공적인 흥행에 힘입어 후속편 ‘28주 후’(2007)도 만들어졌다. 또한 컴퓨터게임 ‘바이오하자드’를 원작 삼아 만든 ‘레지던트 이블’은 2002년에 첫 선을 보인 뒤 2016년에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 나오기까지 장장 14년간이나 이어지며 장수하는 좀비물로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에서 좀비는 군산복합체의 연구소에서 인위적으로 합성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탄생하며 지능은 낮아지고 신경계나 근육은 강화되는 ‘생물병기’가 된다.

위 작품들에 등장하는 좀비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산 사람이라는 점에서 좀비 장르가 과학적 설정 지향의 SF쪽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좀비 영화는 바이러스에 의한 생물재난, 인류종말을 낳는 범유행전염병 등으로 그려지며 공포물에서 과학적 장르로 확장됐다. 위 사진부터 영화 ‘레지던트 이블’(2002) ‘월드워Z’(2013) '부산행'(2016). 시네마서비스ㆍ롯데엔터테인먼트ㆍNEW 제공

세계종말 서사로서의 좀비

좀비가 갖는 문화적 함의는 다양하지만, 특히 근년 들어서는 세계 종말을 가져오는 일종의 재난물로서 관심을 끌고 있다. 흔히 ‘좀비 아포칼립스(zombie apocalypse)’, 즉 좀비 묵시록으로 부르는 이 설정은 좀비들이 계속 산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악순환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결국 인류가 멸망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구성은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등 문화심리학적 사회 변화의 거대한 은유로서 해석되기 쉬우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겪는 공포와 저항 과정이 작품마다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이런 내용으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소설과 영화로 인기를 끈 ‘월드워Z’(2013)이다. 그리고 일본 만화 원작 및 영화 ‘아이 앰 어 히어로’(2016) 역시 남아있는 인간들끼리의 내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데다 좀비가 된 다음의 새로운 세계관에 일면 긍정적인 요소까지 집어넣어서 좀비 장르의 새로운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한국에서는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2010~) 시리즈가 안정적인 팬층을 거느리는 등, 20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공포물이나 SF의 팬 일부만 즐기는 비주류 장르였던 좀비물이 어느덧 주류 문화의 키워드 중 하나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작년에 발표된 영화 ‘부산행‘의 성공도 큰 몫을 차지했다.

좀비가 흡혈귀나 늑대인간 등 공포물의 다른 인간형 식인 괴물들과 달리 독자적인 장르로 진화를 거듭해 온 원동력은 아무래도 위와 같은 상징성에 더해서 과학적 설정에 기반을 두려는 SF의 특성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비 묵시록은 에볼라바이러스나 조류독감처럼 팬데믹(pandemic), 즉 범유행전염병을 일으키는 생물학적 재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과학적 대처가 가능하고 때로는 치유와 원상회복이 되기도 한다. 자연 재난과는 달리 인간의 힘으로 통제와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좀비물을 즐기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흔들리기 쉬운 존재이고 때로는 변질되거나 타락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원상회복력을 발휘한다는 기대, 바로 그 기대와 믿음을 좀비물에서 확인하고픈 것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2009년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한 조지 로메로. Nicolas Genin 촬영. 위키미디어

조지 A. 로메로

1940년 2월 4일~2017년 7월 16일.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을 오가며 영화 필름을 대여해 보곤 했다. 카네기멜론대를 졸업한 뒤 단편영화와 광고영상 등을 찍는 일을 했다.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동료들과 몇 달에 걸쳐 완성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은 1억2,000만원 정도의 제작비로 그 150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두었으며, 나중에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문화적, 역사적,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지정하여 미국 국립영화보존소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는 저작권이 풀려서 유튜브에서 고화질로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예산 문제로 흑백필름을 쓴 것이 오히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사실감을 주었다. 흐르는 피는 초콜릿 시럽을 썼고 인육을 뜯어먹는 장면은 햄을 썼다고 한다.

수 십 년간 숱한 좀비물 및 공포영화의 연출과 제작, 각본, 때로는 연기도 하면서 좀비 장르의 대부로 활동했다. 2009년에 캐나다 국적을 취득한 뒤 토론토에 거주하다 올해 여름에 폐암으로 자택에서 향년 77세로 작고했다. 좀비 주제의 드라마 ‘워킹데드’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방송된 에피소드에서 그에게 헌정한다는 자막을 내보내며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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