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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헬조선’에서 보낸 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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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헬조선’에서 보낸 한철

입력
2015.12.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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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을 낸 사람의 90%는 깜짝 놀란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책이 기대만큼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두 번째 책을 낸 사람의 90% 역시 깜짝 놀란다고 하는데, 지난 책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대치를 바닥까지 낮췄지만 여전히 책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남은 10% 중 5%는 책을 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3%는 본업이 바빠 책 판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으며, 2%는 지독한 회의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상 밖의 판매량에 자면서도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는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쉽지만 오늘 이 자리에는 없다. 편의상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모든 거짓이 그렇듯 여기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바로 지금 내가 깜짝 놀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갑작스러운 홍보에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얼마 전 두 번째 책을 내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은 따로 있다. 인터넷 서점 MD 시절부터 따지자면 나는 10년 가까이 출판계에 한쪽 발을 걸쳐 왔다. 매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을 겪고 있는 출판계 사정을 알만큼은 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두 번째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내가 깜짝 놀랐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했다. 말하자면 깜짝깜짝 놀란 셈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잘 놀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무심결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화들짝 놀라며 하루를 시작할 정도다. 나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유행에 대처하는 정부의 모습에 놀랐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놀랐고, 1차 민중총궐기에 대한 경찰의 폭력 진압에 놀랐고, 세월호 참사 청문회가 지상파에서 보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 높으신 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여과하지 않고 내뱉는 모습에 늘 놀란다.

세월호 청문회에서 눈물 흘리는 단원고 학생 어머니. 연합뉴스
세월호 청문회에서 눈물 흘리는 단원고 학생 어머니. 연합뉴스

최근에는 중앙일보도 동아일보도 아닌 신문에 실린 ‘간장 두 종지’ 칼럼을 보고 놀랐고, 두산 그룹이 20, 30대 신입사원들에게 ‘희망 퇴직’을 권유한다는 뉴스에 놀랐고, 권유에 따르지 않을 경우 노무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연수원으로 보내 휴대전화를 압수하고 대화를 금지하고 화장실 가는 횟수를 제한하고 그런 것들을 어길 때마다 경고장을 발부해 경고장이 3회 누적되면 퇴직을 종용한다는 폭로에 놀랐고, 어느덧 2015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고, 그 며칠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레 놀라며, 내가 늘 게으르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놀라운 것은 매번 끊임없이 놀라는 나의 모습이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2016년에는 놀라지 않기로 했다.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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