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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키티호크호 선상 반란(10.12)

입력
2017.10.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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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2일, 베트남전쟁 작전 중이던 미 항모 키티호크 호에서 흑인 인종 폭동(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72년 10월 12일, 베트남전쟁 작전 중이던 미 항모 키티호크 호에서 흑인 인종 폭동(저항운동)이 일어났다.

키티호크(Kitty Hawk) 호는 1961년 건조돼 2009년 1월 퇴역한, 가장 마지막까지 대양을 누빈 미국의 재래식(비핵추진) 항공모함이다. 만재 배수량 8만3,000톤급으로 항공기 85대와 5,600여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베트남 전쟁과 걸프전 해군 주력으로 활약했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였던 1972년 10월 12일 키티호크호에서 흑인 수병들이 함내 인종차별에 항의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함상 노예와 다름없던 제2차 세계대전 때와 같지는 않았겠지만 70년대 함상의 흑인차별은 미국 본토보다 훨씬 심했다.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대였고, 주요 지휘관은 전원 백인이었다. 흑인 수병들은 같은 계급이어도 청소 등 허드렛일에 배치됐고, 크고 작은 인종 충돌이 있을 때도 처벌 등에서 표나게 차별을 받았다.

충돌은 키티호크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했을 무렵 시작됐다. 흑백 수병 간 사소한 말다툼이 주먹질로 번져 쌍방 60여명이 부상했다. 지휘부는 싸움에 가담한 26명을 샌디에이고 군사법정에 세웠다. 전원 흑인이었다. 며칠 뒤에는 역시 수빅만의 한 함대 급유선(Hassayampa호)에서 흑인 수병 12명이 지갑 도난사건에 항의해 복무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백인 수병 7명이 구타당해 흑인 수병 6명이 또 기소됐다.

전쟁 말기였고, 반전 운동 기운이 미군 파병 부대에도 확산되던 때였다. 해군의 반전운동은 ‘SOS(Stop Our Ship)’라 불렸다. 흑백 갈등은 반전 운동과 무관했지만, 언제든 도화선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2일 밤 시비 끝에 백인 수병들이 흑인 수병을 구타하면서 촉발된 키티호크호 반란은 다음 날까지 이어지면서, 46명의 중경상자를 낳았다. 늘 있어온 일과 달리 그 폭동은 베트남전 작전(Linebacker Operation)을 수행 중이던 거대 항모를 약 12시간 마비시켰다. 설득 끝에 상황은 종료됐지만, 흑인 12명이 기소됐다. 해군참모총장 엘모 줌왈트(Elmo Zumwalt Jr., 1920~2000)가 해군 복무규정을 개정, 인사 등에서 인종 차별 여지를 최소화하고 새로운 인종관계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도 키티호크호 함상 폭동이 계기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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