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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그들이 '일만회'를 팔고 산 까닭

입력
2018.01.12 15: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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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초 남쪽 지역의 고교 동기 5명이 나이 60을 앞두고 수원 광교산에 오른 뒤 뒷풀이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이들 중 누군가가 "곧 환갑이 되는데 우리끼리 몰려다니는 것 말고 뭐 좀 뜻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말을 꺼냈다. 고교 졸업 후 40년 가까이 죽마고우로 지내 온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게나마 모교 후배를 돕는 일을 해 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1인당 매월 1만원씩 낸다'는 취지로 '일만회'를 결성한 이들은 곧바로 동기들에게 동참을 요청하는 사발통문을 돌렸다. 금세 30여명이 모였다.

▦ 이렇게 시작된 모임은 지난해까지 14년을 이어 오면서 매년 500만원 안팎의 돈을 모아 '가정 형편이 어렵고 성적보다 품행이 모범적인 모교생' 1~2명을 추천 받아 지원해 왔다. 그 동안 회원은 진폭이 있었지만 30명대를 꾸준히 유지했고 수혜학생도 3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회원들이 70줄에 접어들면서 동력이 현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줄곧 모임을 이끌어 온 동기 간사가 2016년 말 고민 끝에 제안했다. "우리가 여태껏 잘해왔지만, 이제 힘에 부치니 2~3년만 더 끌어간 뒤 후배 기수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

▦ 반대가 적지 않았지만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동문회보에 '일만회를 팝니다'는 제목의 공고를 냈다. 모임의 취지와 연혁을 상세히 소개한 글은 "후배님들에게 우리의 정성과 뜻과 마음을 모아 일만회를 팝니다. 사십시오. 얼마냐고요? 예, 거저 드리되 이월금까지 얹어 드립니다. 사서 더욱 멋진 일만회를 운영해 주십시오"라고 맺었다. 호응이 나오는 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1년 후배 기수가 "선배들의 귀한 뜻을 이어 가겠다"고 먼저 손을 들어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후 인수인계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올해부터 일만회 운영은 4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후배 기수가 맡게 됐다. 곱게 키운 자식을 떠나 보낸 듯한 선배들의 섭섭함과 걱정을 알기에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들도 안다. 수백만 원의 이월금과 함께 나무를 더욱 튼실하게 키워 또 다른 후배에게 건네 줄 숙제까지 물려받았음을. 생텍쥐베리가 말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자기와 무관한 가난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그들이 감사와 격려 속에 일만회를 흔쾌히 팔고 산 이유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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