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등록 : 2017.09.02 04:40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우주의 비밀이 뭐냐고? 거대한 농담이란다!

등록 : 2017.09.02 04:40

<26> SF 유머의 대가 더글러스 애덤스

#1

BBC 라디오서 첫선 ‘히치하이커’

우울증 로봇, 우발적 지구종말 등

우주적 규모의 기상천외 상상력

과학적 엄숙주의 깬 통쾌한 컬트

#2

모든 것의 답 42, 그 질문은 몰라

웃으며 곱씹게 하는 뼈 있는 농담

사망 후 진화학자 도킨스의 추모

“과학의 친구, 문학 선각자 잃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우주여행의 필수품으로 꼽히는 타월 위에, 슈퍼컴퓨터가 750만년 만에 알아낸 삶과 우주에 대한 궁극의 답, ‘42’가 쓰여있다. 이제 맞는 질문만 찾으면 된다. Julian Hammer 위키미디어

2005년, 서울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개봉한 영화에 흥미로운 현상이 일었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관객이 점점 늘고 입소문이 퍼져 날이 갈수록 객석 점유율이 오르더니, 어느 순간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소품인 수건을 목에 두르고 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또 대사를 따라하고 어떤 장면에서는 요란하게 리액션을 함께 하는 등, 관객들끼리 적극적으로 영화 관람 경험을 공유하는 이른바 컬트(cult)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전국에서 오로지 한 극장에서만 개봉했던 이 작품은 급기야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극장에서 확대 상영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바로 SF 코미디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처음 라디오 드라마로 선보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우주적 유머와 풍자로 곧 마니아 층을 형성했고 소설, TV드라마, 영화로 나올 때마다 인기를 끌었다.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참을 수 없는 지구 종말의 가벼움

어느 날 지구가 종말을 맞는다. 이유는 근처 우주공간에 새로 은하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관료주의에 절어 있는 한 외계 종족이 철거한 것이다. 주인공은 지구에 몰래 와 있던 외계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뒤 함께 은하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건과 인물들을 겪는다. 이러한 기본 틀을 배경으로 인간과 우주의 사실상 모든 대상을 아우르는 풍자와 유머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스토리에 전 세계의 독자들은 열광했다.

작품의 캐릭터 중에 가장 인기를 끈 것은 로봇 마빈이다. 마빈은 우울증에 걸려 있는데다 자신의 그런 증상을 상대방에게 전염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든 외계인이든 컴퓨터든 상관없이 이 로봇과 대결하는 상대방은 즉시 전의를 상실하고 자괴감에 빠져 우울해하다가 미치거나 자살해 버린다. 영화에서 몸집에 비해 커다란 머리가 붙은 귀여운 모습으로 한국 팬들에게도 사랑받은 마빈은 ‘신경증적 질환에 시달리는 로봇’이라는 설정 하나만으로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바로 이게 애덤스식 SF 유머이다. 그는 SF는 물론이고 모든 문예작품에 등장하는 온갖 정서며 감정이며 캐릭터며 설정들을 가져다가 그만의 방식으로 비틀고 뒤집은 뒤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재조합해 내놓았다. SF 마니아들도 이런 식의 기발한 상상력은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열렬한 호응으로 답했고, 그 결과 원래 예정이었던 3부작에 이어 6권까지 출간이 되었다. 아마 작가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후속편이 더 나왔을 것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우울증을 앓는 로봇 마빈.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원래 1978년에 라디오 드라마로 처음 시작했던 이 작품은 곧 소설로 출간되었고 이어서 TV연속극, 연극, 게임, 캐릭터에 음악까지 사실상 모든 매체를 망라하는 그야말로 '원 소스 멀티 유즈(OSMU)'의 모범적인 사례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을 비롯한 전 세계의 애덤스 팬들은 질리기는커녕 새로운 콘텐츠가 나올 때마다 마음껏 즐기며 공감대를 나누었다. 이 작품과 작가 애덤스는 사실상 영국이 배출한 최대의 문화상품 중 하나였다.

삶과 우주,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의 답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어떤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750만년 동안 생각을 계속하는 컴퓨터가 등장한다. 전 우주를 관장하는 이 컴퓨터는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의 질문과 답을 고민하는데, 결국 질문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하기 위해 별도의 컴퓨터를 하나 더 만든다. 그게 바로 지구이다. 지구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궁극의 질문을 고민해오다가 마침내 결과가 나오기 5분 전에 그만 사라지고 만다. 바로 그 때 은하고속도로 건설 때문에 철거당한 것이다. 그러나 원본과 똑같은 제 2의 지구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어 처음에 간신히 탈출했던 주인공은 다시 원래와 다름없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애초의 컴퓨터도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그게 다름 아닌 ‘42’이다. 이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는 작가가 세상을 떠나서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42라는 숫자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오마주한 것이라는 해석에서부터 물리학, 수학, 고대 신화, 컴퓨터 언어 등 온갖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애덤스의 유머 감각을 정확히 헤아릴 길은 난망이다.

이 작품에 등장해 유명해진 또 하나의 존재가 ‘바벨피시’다. 원래는 주변 생물의 뇌파를 먹고 사는 생물이지만, 그 과정에서 뇌파에 담긴 사고 신호를 숙주의 뇌에 배설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주 어디에서나 통하는 만능 번역기가 되었다. 처음 만난 외계인들끼리 서로의 귀에 바벨피시를 꽂는 모습은 이 작품에서 곧 익숙해지는 장면이다.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 열광적인 컬트 팬들이 생겨난 것은 이런 식의 기발한 설정이 끊이지 않는 신선한 즐거움을 이내 휘발시키고 싶지 않은 심정에서였을 것이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는 국내 개봉 당시에도 컬트적 호응을 얻었다.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애덤스의 책들은 한국에서 독특한 출판 이력을 지니고 있다. 대표작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 차례 이상 독립적으로 번역판이 출간된 바 있다. 또한 세계의 멸종위기종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쓴 에세이 ‘마지막 기회라니’도 역시 두 가지 이상의 판본으로 여러 차례 절판과 재간을 거듭했다. 특히 이 책은 생태 에세이로는 드물게 충성도 높은 팬층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의 소설은 읽지 않더라도 이 저작은 탐독하면서 원서까지 구해 소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그가 구사하는 ‘영국식 유머’는 독자에 따라 호오가 갈리기도 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읽기 시작했다가 이내 덮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마지막 기회라니’의 천연덕스럽고 능청맞은 유머에는 대부분의 독자가 즐거워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육지의 종을 섬에 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건 알 카포네와 칭기즈칸과 루퍼트 머독을 와이트섬에 이주시키는 것과 같다. 현지인들은 버틸 재간이 없다.”

오래 전 직수입 원서를 판매하는 서점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처음 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엔 한국에서 SF를 접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제목에 흥미가 동했지만 표지에서 우주를 배경으로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 약 올리는 표정을 한 캐릭터를 보니 도무지 내용이나 책의 성격이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해학집인가보다 하고 시큰둥하게 책을 내려놓았던 것 같다. 나중에야 그 작가가 ‘코믹 SF'라는 분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대가임을 알게 되면서 SF문학의 외연이 더 확장되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애덤스는 SF 마니아들이 간혹 함몰되기 쉬운 과학적 엄숙주의를 통렬하게 날려버린 유쾌한 인물이다. SF와 판타지의 경계가 무색할 만큼 무제한의 상상력과 유머가 결합된 스토리텔링에서 그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특히 그의 발상들은 실없는 허풍이기보다 과학적 상상력를 교묘하게 자극하고 고무시키는 세련된 반어법에 가까워서 더 가치가 있다. ’무한불가능확률추진기‘를 엔진으로 달고 다니는 우주선을 또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독자로서는 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좁게는 SF문학에, 그리고 넓게는 인류의 상상력에 새로운 지평을 더한 인물로 애덤스의 진가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 Michael Hughes 위키미디어

더글러스 애덤스

1952년 3월 11일~2001년 5월 11일. 영국의 작가. 소년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케임브리지대학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진학해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대학생 때부터 코미디 클럽에서 활동했으며 졸업 후에는 방송국에서 희극 대본을 썼지만 당시의 유행과는 다른 스타일 때문에 길게 일하지 못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2m에 육박하는 큰 키로 보디가드 일을 한 적도 있다. 1978년에 BBC 라디오를 통해 처음 방송된 연속극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곧 인기 작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스스로를 ‘과격한 무신론자’라고 밝혔으며 인간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종교를 흥미롭게 지켜본다고 말했다. 글 쓰는 속도가 느리기로 유명해서 편집자가 호텔방에 그를 감금하다시피 하고 3주간 같이 지낸 적도 있다.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어 기타와 피아노 연주를 즐겼으며 친분이 있던 핑크 플로이드의 라이브 공연에서 협주를 하기도 했다. 멸종위기종 보호 등 환경생태운동가로서도 활동했다. 2001년 캘리포니아에서 실내운동 뒤 휴식 중에 심장마비가 와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은 친구를 잃었고, 문학은 선각자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더글러스 애덤스 무덤 앞에 팬들이 꽂아놓은 볼펜이 가득하다. Pierre-Yves Beaudouin 위키미디어

<소개된 책>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옮김

책세상 발행

마지막 기회라니?

더글러스 애덤스, 마크 카워다인 지음

강수정 옮김

홍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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