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남자라면…’ 이 한마디가 감정 불구자를 만든다

알림

‘남자라면…’ 이 한마디가 감정 불구자를 만든다

입력
2017.09.28 15:36
0 0

온건파 페미니스트가 분석한 남성성

가부장제에선 ‘강한 남성’만 인정받아

지배자 배역 받아 감정·욕망을 왜곡

“감정 평안 못 누려” 남녀 모두 피해자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남성의 폭력성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파괴한다. 미국의 흑인 여성운동가 벨 훅스는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에서 가부장적 사회가 남자들을 감정적 불구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남성의 폭력성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파괴한다. 미국의 흑인 여성운동가 벨 훅스는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에서 가부장적 사회가 남자들을 감정적 불구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벨 훅스 지음ㆍ이순영, 김고연주 옮김

책담 발행ㆍ320쪽ㆍ1만4,000원

‘남자는 섹스를 원한다.’ 이 말은 쓸모 없다. 적어도 문명사회에선 그렇다. 문명 공동체에선 본능의 내용보다는, 무엇이 본능을 허락하고 억압하고 부추기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본능에 대한 지나친 천착은, 인간이 매우 뛰어난 연기자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하고 싶은 것과 해도 되는 것의 괴리 사이에서, 인간은 집착을 연기하고 저항을 연기하고 보람을 연기한다.

미국의 흑인 여성 운동가 벨 훅스의 2004년 책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은 가부장적 사회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배역에 대해 비판적으로 짚은 책이다. 가부장제의 폐해는 익히 알려진 바이지만, 저자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집중한다. 그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특권”이 아니며 남성을 “감정 불구자”로 만드는 사회적 질병이다.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에서 남성들은 감정의 평안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이 감정의 평안은 다른 이들에게 통제력을 발휘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보상받고 성공을 거두는 느낌과는 다르다. (…)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진정으로 보상을 해 왔다면 가정 내 폭력과 중독이 그처럼 만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폭력은 페미니즘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만일 가부장제가 보상을 해 왔다면 대부분의 남성이 자신의 일에서 느끼는 엄청난 불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배자, 통제자라는 배역을 부여받은 남자들에겐 다양한 행동양식이 요구된다. 그중 하나가 ‘섹스에 죽고 못 사는’ 역할이다. 섹스의 대상은 반드시 남자가 아닌 여자여야 하며, 방식은 교감이나 합의보다는 폭력과 통제가 선호된다. 저자가 “통과의례”라고 부르는 이 가부장제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성장기의 남자들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왜곡하는 수순을 밟는다. 난생 처음 성교를 목격한 소년이 느낀 역겨움이나, 포르노물을 보며 밀려오는 공허함, 동성을 보며 느끼는 욕망 같은 건 꺼내 놓을 수 없는 비밀이다. 자고로 ‘남자라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남자는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말하는 가부장적 사고 때문에 섹스를 중독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난 뒤, 남성들은 그 섹스를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세상, 혹은 원하는 만큼 절대 얻을 수 없는 세상, 혹은 원치 않는 누군가를 강제하고 조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그 결과로 섹스를 거부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적이 된다. 반대로 섹스를 강요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적이 된다. 가부장제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파괴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남자와 여자 모두 가부장제를 지지한다. 가부장제를 특징 짓는 “맹목적 복종, 두려움을 제외한 모든 감정의 억압, 개인 의지의 파괴, 권력을 가진 존재의 생각과 어긋나는 모든 생각의 억압”이 사회 통제의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여자나 남자는 중심부에서 밀려나게 되고, 이를 견딜 수 없는 자들은 결국 그 법칙 아래로 들어온다. 아들을 가진 싱글맘이 아이가 “계집애처럼” 자랄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혹독한 훈육으로 아들을 ‘남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여자와 남자 모두를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훅스는 페미니즘 진영의 소위 ‘온건파’다. 저자는 화해를 모색하고 촉구하는 자신의 태도가, 가부장제 아래서 얻어맞고 강간당한 여자들의 분노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책에 “페미니스트들의 노여움을 초래”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노여움도 불사하는 훅스의 주장은, 어느 때보다 격렬한 성담론으로 들끓는 2017년 대한민국을 치유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추석, 전 부치는 아내 옆에서 “나도 피해자”라며 우는 데 이 책이 사용된다면 훅스의 차기작은 조금 다른 내용이 돼야 할 것이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