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국왕 가운데 ‘존’은 딱 한 명이다. 헨리 2세의 막내, 사자왕 리처드 1세의 동생. 헨리나 리처드, 엘리자베스 등과 달리 ‘존’이 유일한 까닭은, 그 이름에 밴 기억이 너무 씁쓰레해서였다고 한다. 70~80년대 한국의 세계사 교과서에도 ‘존왕의 실정(失政)’챕터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에겐 아버지 등 뒤에서 형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왕이 된 형이 전장에 나간 틈에 또 옥좌를 넘보다 낭패를 본 전력이 있다. 야심은 컸으나 무능했고, 형처럼 전투에 능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변덕스럽고 사치스러웠다. 귀족 영주들이 그를 탐탁하게 봤을 리 없다. 교황(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파문 당한 최초의 영국 국왕도 그였다.
그의 면모가 추저분해진 데는 사실 형 탓도 있었다. 재위 10년 동안 국내 체류기간이 고작 6개월이었다는 리처드는 십자군 전쟁 등으로 자신의 용맹과 명성을 떨치느라 국가 재정을 거덜 냈다. 잦은 전쟁과 중과세로 귀족 농민 상인들의 불만이 이미 컸으나, 대들자니 그가 너무 강했다.
존 길링엄 등이 쓴 ‘마그나카르타의 해-1215’(황정하 옮김, 생각의나무)에 따르면 귀족들이 새로 옹립할 마땅한 왕이 없어 반란 대신 택한 게 왕권을 제한하고 교회와 귀족 권한을 보장 받는 각서였다고 한다. 800년 전 오늘(6월 15일) 존왕은 귀족들에게 이끌려 런던 템즈 강변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대헌장 마그나카르타에 옥새를 찍었다.
마그나카르타가 근대 인권의 상징이 된 데는 총 63개 조항 가운데 39, 40조 덕이 크다. “39. 자유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와 같은 신분의 동료에 의한 합법적 재판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는 한 체포 감금 점유침탈 법익박탈 추방 또는 그 외의 어떤 방법에 의하여서라도 자유가 침해되지 아니하며, 또 짐 스스로가 자유민에게 개입되거나 또한 관헌을 파견하지 아니한다.”“40. 짐은 누구를 위하여서라도 정의와 재판을 팔지 아니하며, 또 누구에 대하여도 이를 거부 또는 지연시키지 아니한다.”(위 책)
대헌장이 선언한 평등과 법치, 자유의 권리는 물론 당시 인구의 10%였던 영주와 기사 자유시민에 국한된 거였지만, 그 정신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과 미국 독립선언, 유엔인권선언으로 이어지며 인류의 값진 유산이 됐다. ‘존왕의 실정’덕이었다.
영국은 지난 2월 현존하는 1215년판 대헌장 사본 4점을 시민 1,215명에게 공개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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