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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맛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기

입력
2017.04.0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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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정식이라는 간판이 붙은 음식점에 가면, 이거 뭐 옛날 임금님이나 먹었을 듯싶은 진수성찬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떡 차려져서 나온다. 그냥 눈요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그렇다고 눈요기만 할 수는 없어 숟가락을 들고 이것저것 먹다 보면 나도 몰래 과식을 하게 된다.

그렇게 과식을 하고 오는 날은 온종일 정신이 흐리마리하다. 이슥한 밤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아도 원고지 위에 글 한 줄 쓸 수 없다. 이제 다시는 그런 자리는 안 따라갈 거야, 하고 결심하지만 인생살이가 어디 내 맘대로 되는가. 사실 나는 평소에 소식(小食)을 실천하려 애쓰는 편이다. 글을 쓰기 위해 머릿속을 맑게 유지하는 일도 그렇지만 소식은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찰음식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일에 열심인 어떤 스님은 ‘소식’의 의미를 이렇게 설파했다.

“건강을 위해서만 하는 소식은 반쪽이고, 우리 생각의 반을 더는 것까지 연결되어야만 진정한 소식이다.”(대안, <식탁 위의 명상>)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실제로 소식을 해보면 머리가 맑아져서 쓸데없는 생각과 욕망에 덜 끄달리게 된다.

어떤 아랍 작가의 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아라비아의 왕이 의사에게 물었다. “내가 하루에 얼마만큼 먹는 것이 몸에 좋겠소?” 의사가 대답했다. “무게 백 디램의 음식을 드십시오.” 의사가 권장하는 음식의 양이 적다고 여긴 왕이 다시 물었다. “그만큼만 먹어도 내 몸을 지탱할 수 있겠소?” 의사가 대답했다. “네, 그 만큼만 드시면 음식이 폐하를 지탱해 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드시면, 폐하가 음식을 지탱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식을 부추기는 식탁 앞에 앉을 때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우주의 원리에서 보면 물질은 하나가 비면 다른 하나가 채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음식을 채우는 그릇(위)을 비우면 건강한 정신이 우리 몸 그릇에 깃들게 되는 법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소식, 즉 물질의 욕심을 비우면 우리 영혼이 정화되는 효과도 있다. 가볍게 먹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지나친 식탐을 자제할 수 있으면 다른 욕망에 대한 자제력도 배가된다.

본래 미식가가 아니지만, 나는 음식을 대할 때 맛으로 먹으려 하지 않는다. 대체로 사람들이 탐하는 미식이란 것이 온갖 인공조미료로 범벅이 된 경우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혀를 자극하는 맛을 따라가다 보면 소식을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되도록 양념이 덜 들어간 음식, 덜 가공된 음식을 먹으려 노력한다. 오늘날 요리문화의 지나친 발달은 인간을 탐식으로 몰아가고, 그것이 또한 현대인들의 건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TV를 켜면 온갖 맛집들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미각을 자극한다.

어찌 먹거리뿐이랴. 우리 시대는 자극과 속도가 넘쳐난다. 온갖 매체에서 보듯 현란한 색채와 감각적 광고문안은 사람들의 오관을 자극하고 달고 맵고 짠 맛으로 끌어당긴다. 그런 눈속임에 끌려 다니다 보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그래서 이 초고속 문명에 지친 이들은 녹색 숲에서 휴식을 구하고, 옛날 엄마가 해주던 가정식 밥집을 찾아 다니기도 한다.

일찍이 장자는 “군자의 사귐은 물같이 담백하지만,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하다”고 했다. 여러 해 전 우리 가족은 시골로 솔가하여 야생의 삶을 즐기고, 잡초를 뜯어먹으며 지낸다. 우리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묻는다. 아니, 잡초를 무슨 맛으로 먹죠? 그러면 대꾸한다. 싱겁고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맛으로 먹죠. 그러면 자극을 탐하는 혀에 덜 놀아나게 되죠. 요컨대 우리가 맛의 지배를 덜 받게 되면, 그만큼 존재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숱한 생의 속박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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