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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낮은 ‘도’는 멀리 간다

입력
2017.09.2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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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단편소설 ‘도도한 생활’에서 낮고 초라한 음의 힘과 생명력을 읽는다.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 번째 음이니까. 첫 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 도- 하고 울었다.(중략) 낮은 음과 높은 음을 함께 눌렀을 때 낮은 음이 더 오래 간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주인공은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취업 준비생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고향집에 있는 오래된 피아노를 팔아 치우려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집안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처럼 피아노를 처분하지 않고 안 그래도 복잡한 주인공의 서울 자취방으로 옮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반지하방의 피아노는 다른 잡동사니들과 함께 빗속에 잠겨간다. 그 때 그녀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건반 ‘도’를 누른다. 겨우 ‘도-’하고 울려 퍼지는 음. 그 초라한 시작음이 높은 음들 보다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게 된다.

첫 번째 음인 ‘도’는 초라한 시작점이다. 화려한 화음을 달고 있지도, 현란한 움직임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낮은 음 ‘도’는 가장 오래 울리는 음이다. 우리가 비록 많은 것을 지니지 못하고 한평생을 살지라도, 자기 안의 ‘도’를 많이 눌러야 한다.

우리는 ‘레미파솔라시도’ 또는 그 너머의 음에 관심이 많다. ‘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사람은 그 이후의 음도 아름답게 낼 수 있다. 먼저 자신의 ‘도’를 크게 울려보라. 세상은 무작정 앞서가는 사람 보다, 자신만의 색깔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내는 사람을 좋아한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교향악단의 소리는 자세히 들으면 하나 하나의 악기들이 제각기 소리를 낸다. 아무리 훌륭한 악기 연주자도 맨 처음 그 악기를 연주할 때, 어슬프고 보잘것없는 소리를 냈으리라. 그 시작을 소중히 여기고 계속 가꾸어 왔기에 지금의 완벽한 소리를 갖게 된 거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의 초라한 몸짓, 그것은 인생 전체를 통해 울려 퍼질 가장 기본 음이 된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말고 더 울려 퍼지게 가꾸어야 한다.

소울 음악의 거장 레이 찰스(Ray Charles)는 어릴 때 시력을 잃었다. 온통 암흑뿐인 그에게 남은 것은 세상 만물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세상 모두가 어둠의 아이라고 부를 때, 그의 어머니는 레이를 ‘완전한 영혼’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리하여 이 슬픈 천재는 어둠 속을 눈이 아닌 귀로 더듬으며 걸어갈 힘을 얻는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귀로 세상 만물을 어루만졌다. 전세계인의 경쾌한 발걸음에 묻어있는 그의 음악은 이렇게 암흑의 절규에서 나왔다.

어둠 속의 외침은 가장 찬란한 빛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저마다 어둠을 갖고 있고, 그 어둠 때문에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 낮고 어두운 우리 만의 ‘도’를 소중히 짚어나갈 때 우리 인생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우리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들으며 감동을 받는 것은 어둠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빛으로 변하여 우리의 습한 마음을 말려 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자신의 어둠을 아름답게 노래할 때 타인의 얼룩지고 습한 인생을 말려줄 수 있다. 낮은 ‘도’는 위대한 음이다. 낮은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다.

콘서트 현장에서 만나는 일부 청소년들이 가진 패배의식에 마음이 아프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을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의 낮은 ‘도’를 찾아내고 그 건반을 힘껏 눌러보라고. 너의 낮은 소리는 그 어떤 잘난 높은 음들 보다 길게 멀리 퍼져갈 거라고. 그들은 믿지 않는 눈치다. 그래, 지금 당장 믿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실수로라도 자신의 낮은 음 건반을 누르는 날이 올 테니까.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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