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때까지 해주는 ‘필터성능시험’ 문제
필터주사기 선택, 추가비용 지불한 환자만 ‘봉’
주사제 용기인 유리앰플을 자를 때 나온 작은 유리조각 등 이물질이 주사기를 통해 체내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필터주사기’가운데 일부 제품이 필터 기능이 전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대학병원 등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필터주사기 문제점을 인지하고도 방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료기관에서 현재 사용 중인 주사제 보관용기인 유리앰플은 구조적으로 유리파편 발생을 막지 못한다”고 했다. 유리앰플은 위쪽 목 부분이 잘록한 유리관으로, 주사하기 전 목 부분을 잘라 내용물을 주사기로 빼내 사용하는데 목 부분을 자를 때 미세한 유리파편이 주사액에 섞여 들어가 인체 안으로 흡수된다. 유리앰플은 고온 밀봉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개봉 시 감압 상태의 공기가 급팽창하는 과정에서 유리파편이 주사액 속으로 혼입된다.
정맥을 통해 인체 내로 들어온 앰플의 유리파편들은 녹지도 않고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인체 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혈전을 만들고, 패혈증을 유발하는 등 환자 안전과 생명을 위협한다. 인체에 흡수된 유리파편은 가장 먼저 폐에 이르고 이어 간, 비장을 거쳐 마지막에는 콩팥에 간다. 유리파편이 폐 비장 콩팥 골수 뇌 등에 축적되면 내피세포를 손상해 혈전이나 육아종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유리파편이 혈관 내 유입되면 미세혈관을 막아 신생아괴사성장염은 물론 유리파편에 박테리아 오염이 일어나면서 패혈증도 일으킬 수 있다. 전문의들은 “유리앰플 주사제를 많이 사용하는 중환자실, 신생아치료실 등에 장기간 입원하고 있는 환자는 유리파편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다”고 했다. 정기적으로 정맥투여를 하는 어린이나 항암제를 쓰고 있는 환자군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0년 ‘주사제 안전사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신생아 집중치료처지실 환자, 소아 및 성인 중환자실 환자, 암환자 등 중증 질환자 및 중증 수술환자는 우선적으로 필터주사제 사용을 권장하고 있는데 필터주사기 일부 제품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필터기능 없는 이름만 ‘필터주사기’ 유통
국내 의료기관에서 사용하는 필터주사기는 일체형과 분리형이 있다. 일체형은 한 개의 주사바늘로 주사기로 주사제를 빼내 그대로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한다. 주사기에 필터가 부착돼 주사제 채취부터 환자 투여까지 한꺼번에 이뤄진다.
이와 달리 분리형 주사기는 주사기에 필터를 장착해 주사제를 채취한 후 필터를 제거한 후 환자에게 약물을 넣는다. 이론적으로는 필터를 제거하지 않고 주사제 용기에서 약물을 채취해 환자에게 바로 투여하는 일체형 주사기가 사용이 편리하다. 하지만 일부 일체형 필터주사기 제품은 유리파편 등 주사제를 채취할 때 남아 있는 이물질을 걸러내지 못했다. 기자가 일반주사기, 일체형과 분리형 필터주사기를 구입해 직접 물에 모래가루를 넣어 흡입한 결과, 일반주사기와 일체형 필터주사기는 모래가루가 삽입돼 뿌옇게 흐려졌다.
일부 일체형 필터주사기 제품은 제 기능을 상실한 데는 허술한 제품제조 허가가 한몫 했다. 본지 확인 결과, 필터주사기 제조의 핵심기술인 필터성능시험은 업체가 만든 주사기 샘플로 이뤄졌다.
필터성능시험을 대행하고 있는 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업체에서 보내온 샘플 주사기 3개로 필터성능시험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샘플 불량으로 필터성능시험에 탈락할 걱정도 없다. 연구원에 추가비용만 지불하면 성능시험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샘플에 문제가 생기면 연구원에서 시험에 통과할 수 있는 샘플을 가져오라고 연락이 온다”고 전했다. 실제 확인결과, 필터성능시험을 대행하고 있는 수도권의 한 연구원 관계자는 “필터성능시험 성적서 교부 전 제품 이상으로 합격처리가 되지 않으면 업체에 연락해 다른 샘플을 가져오라고 알려준다”면서 “5만원 정도 추가비용만 물면 재시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필터성능시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식 필터성능시험은 업체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 샘플만 잘 만들어 시험에 통과한 후 일반주사기와 다를 바 없는 필터주사기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필터주사기 제조업체 관계자는 “샘플만 잘 만들어 시험에 통과하면 불량품을 팔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시험성적표만 제출하면 병원에 필터주사기를 납품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필터주사기 성능 문제를 제기한 병원은 아직까지 없다”고 말했다.
병원 믿고 필터주사기 선택한 환자만 ‘봉’
의료기관들도 가짜 필터주사기 문제와 관련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필터주사기는 대학병원은 물론 일반 병ㆍ의원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국가에서 제품허가를 받은 제품을 사용하고 있어 문제 없다는 것이 의료기관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국가에서 지정한 연구기관 시험에서 합격한 제품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면서 “자체 테스트에서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병원 관계자는 “식약처가 인증한 제품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대학병원에 필터주사기를 납품하고 있는 업체 관계자는 “일부 대학병원에서는 필터주사기 성능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병원 첫 납품 시 문제가 없는 제품을 납품하면 병원 자체 테스트도 문제 없이 통과 가능하다”고 말했다. 환자 안전보다는 간호사 등 사용자 편의를 위해 필터를 제거해야 하는 분리형 대신 일체형 필터주사기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가짜 필터주사기로 인한 피해는 환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다. 환자들은 유리파편 등 이물질을 제거해준다는 병원 측 설명을 그대로 믿고, 추가비용까지 물면서 필터주사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터주사기를 선택하면 환자가 병원에 줘야 할 비용은 1,000~1,400원 정도다. 필터주사기 납품 가격은 개당 700~800원 수준으로 사용 비용은 환자를 치료할 때 발생하는 재료비 항목으로 정산된다. 이름만 필터주사기일 뿐 일반주사기인 가짜 필터주사기 비용을 환자들이 물고 있는 셈이다.
서울 한 대학병원 외래에서 만난 주부(40)는 “혹시 내가 맞은 주사에 유리파편 같은 이물질이 있을까 두려워 필터주사기를 맞았는데 주사기가 불량품이라면 정말 황당하다”면서 “병원만 믿었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난감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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