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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여운형(7월 19일)

입력
2017.07.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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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테러로 숨졌다.
몽양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테러로 숨졌다.

1947년 6월 2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미군정 치하의 한국이 50번째 회원국이 됐다. 한 달 뒤인 7월 19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IOC 진입 자축 한국과 영국의 친선 축구경기가 열렸다. 갓 독립한 나라가 맨 먼저 가입하는 국제기구로 IOC나 국제축구연맹(FIFA)를 택하는 예는 흔하다. 적은 비용으로 국민을 뭉치게 하고 자긍심을 북돋우는 데 스포츠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 체육부장이, 만능 스포츠맨으로 중국서 체육교사를 한 적도 있는 여운형이었다. 운동장으로 가던 그의 차가 혜화동 로타리를 지날 무렵 트럭 한 대가 길을 막았고, 한 청년이 달려 나와 권총으로 그를 저격했다. 61세의 몽양(夢陽) 여운형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격렬히 맞서던 때였다. 여운형은 미ㆍ소 분할통치의 과도기를 견뎌서 멀지 않은 미래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좌우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몇 안 되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며 볼세비키와 중국공산당과도 협력한 적이 있었고, 독립 후 미군정과도 관계가 썩 나쁘지 않았다. 그의 이념은 좌ㆍ우로 편향되지 않은 민족ㆍ민주주의였고, 통일의 적은 찬탁ㆍ반탁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두고 다투는 진영의 이해관계였다.

하지만 나라 전체가 격렬히 분열하던 때였고, 냉전 기운이 달아오르면서 미국도 대화ㆍ협력이 아닌 선명한 반공 노선으로 기울어갔다. 여운형의 자리 즉 좌우합작 독립통일정부의 자리는 눈에 띄게 협소해져 갔고, 그의 ‘민족’은 이미 축구로 뭉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 진영에 따라 그는 ‘빨갱이’거나 ‘미제의 앞잡이’라 불렸고, ‘회색분자’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그의 대중적 인기는 무척 뜨거워,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무려 60만 명이 운집했다

그는 광복 이후 좌ㆍ우 진영 모두로부터 모두 12차례 암살 등 테러 위협을 당했다. 각목피습을 당했고, 벼랑에서 떠밀려 추락하기도 했고, 총격과 자택 폭탄 테러도 겪었다. 피습 나흘 뒤 19세 청년(한지근)이 체포됐지만,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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