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서울 상수동 언덕 위 작은 가게의 문이 열린다. 들고나는 사람 없이 잠잠히 동네를 지키던 가게는 저녁 6시가 되자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닫는다. 한 시간 뒤 가게 문이 다시 열린다. 이번엔 분위기가 좀 다르다. 활짝 열린 접이식 문으로 주방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는 남자의 등이 보이고, 너덧 개의 테이블엔 이내 손님이 들어 찬다. 간간히 들려오는 말소리, 웃음 소리. 갈 곳 없는 새벽 손님과 인근 부엉이족들로 흥청이던 가게는 새벽 5시가 돼서야 문을 닫는다. 낮에는 디자인 스튜디오, 밤에는 심야식당. 상수동 ‘프로젝트 하다’(이하 ‘하다’)의 하루 풍경이다.
수요일엔 일식집, 토요일엔 맥주집
한때 ‘하다’는 델리숍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빵이나 냉동스프 같은 먹거리를 팔았다. 집에서 음식을 잘 안 해 먹는 1인 가구를 위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바로 꺼내 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판매했다. 그 전엔 칠레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다. 한국에 3개월 간 머물렀던 칠레인 네티가 이곳에서 두 달 간 매주 토요일마다 엄마에게 전수 받은 칠레 가정식을 선보였다. 일본인 청년이 화, 수, 목 저녁마다 미소니코미 우동과 오차즈케를 팔았던 적도 있고, 한국인 청년이 토요일마다 맥주와 뱅쇼에 짜파게티를 안주로 내놓기도 했다.
이 규정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든 이는 디자이너 정다운(36)씨와 조항아(39)씨다. 대기업 디자인 부서에서 일하던 다운씨는 몇 년 전 회사를 나와 친환경 디자인 스튜디오 ‘이베카’를 차렸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선배 항아씨도 나와 공간을 같이 썼다.
다른 사람과 공간을 나눌 생각을 한 건 다운씨다. “주변 친구 중 ‘홍대에서 가게 한 번 해보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애가 있었어요. 하지만 권리금이니 시설비니 생각하면 ‘그럼 한 번 해봐’라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죠. 공간 자체가 기회인데 공간이 없으니 기회조차 없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과 이 공간을 같이 쓰면 어떨까 싶었어요. 어차피 작업실은 오후 6시 이후로는 안 쓰는데 아깝잖아요.”
요리와 여행에 관심이 많은 항아씨도 흔쾌히 동의했다. 가게 한 켠에 부엌을 만들고 작게나마 주방 설비를 갖췄다. 바로 옆에서 숯불갈비집을 운영하는 건물주는 밤 시간에 식당을 해도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맘대로 하라셨어요. 제발 장사해서 돈 좀 벌라고.(웃음) 저희가 하는 일이 너무 돈이 안돼 보였나 봐요.”
지난해 6월 ‘하다’는 공유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바깥 유리에는 ‘디자인스튜디오이자 누군가의 가게’라고 썼다. 평일 오전부터 저녁 6시까지는 다운씨와 항아씨의 작업실, 그 외 시간과 주말에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가게가 된 것이다.
그 후로 1년 간 ‘하다’에는 총 15개의 가게가 거쳐갔다. 성별도 국적도 특기도 목적도 제 각각이었다. 다운씨를 움직인 푸념의 주인공은 덜컥 가게가 주어지자 카레집을 열었다. 금요일엔 샐러드 치킨까스를, 토요일엔 일본식 카레를 팔던 친구는 몇 개월 만에 다시 본업인 일러스트레이터로 돌아갔다.
다운씨는 이곳을 “로망을 현실로 만들어 보는 곳”이라고 말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카페나 차리면 좋겠다’ 이런 얘기 많이들 하잖아요. 그럼 여기서 단 몇 달만이라도 실제로 해보는 거죠. 그래서 경력 많은 사람보다는 초보자 혹은 지망생들의 실험적 공간이 됐으면 했어요. 해보고 잘 맞으면 자기 가게를 열 수도 있고, 잘 안 되더라도 큰 위험 부담은 없으니까요.”
로망의 실현 ”내 것이라 생각하면 못하죠”
단순히 로망의 수준을 벗어나 단호히 본업을 등지고 온 이들도 있다. 현재 ‘하다’에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심야식당 ‘밤키친’을 운영하는 양희성(34)씨가 그런 경우다. 컴퓨터를 전공하고 관련 회사에 다니던 그는 컴퓨터 앞에 못박인 삶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과감하게 호주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음식을 배우고 돌아왔지만 자기 가게를 낼 여력이 없어 식당에서 일하던 그는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하다’ 이야기를 들었고 12월부터 ‘밤키친’을 시작했다.
저녁 7시에 열어 새벽 5시에 닫는 ‘밤키친’은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희성씨가 언젠가 꼭 한 번 시도하려고 마음 먹었던 식당이다. “늦은 시간에 하니까 손님이 많진 않죠. 테이블이 다 찰 때도 있지만 어떤 날은 한 명도 없기도 해요. 이런 시간에 식당을 운영하는 건 아마 제 가게였으면 못했을 거예요. 이 공간의 좋은 점은 자금 부담이 적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다는 거예요.”
밤키친에서는 손님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SNS나 문자로 주문 받아 당일 장을 봐와서 해준다. 지난 크리스마스엔 커플을 위한 커틀릿을 만들었고 겨울날 따뜻한 국물을 원하는 손님들에겐 소고기무국을 끓여 주기도 했다. 고정 메뉴도 있지만 손님 반응을 예민하게 살펴 2, 3주마다 교체한다. “내가 만든 음식을 정말 먹으러 올 사람들이 있을지, 먹으러 온다면 왜 오는지. 초보 창업자들이 가장 걱정하고 궁금해하는 게 이런 거예요. 이곳을 통해 음식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하다’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임대료다. ‘하다’는 요일을 기준으로 월세를 계산하는데 매주 수요일만 쓴다고 하면 한 달에 16만원이다. 밤키친의 경우 4개 요일을 쓰니 한 달에 64만원. 공과금까지 포함된 가격이며, 요일 수가 늘어나면 월세를 조금 더 깎아준다. 희성씨는 같은 크기에 같은 위치로 제 가게를 낼 경우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00만~6,000만원”이라고 말한다. “제대로 하면 1억원은 훌쩍 넘죠. 주방 설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니거든요. ‘하다’는 월세를 낸다기 보다는 투자금을 내고 이익을 가져가는 것에 가까워요. 그릇을 다룰 때도 분리수거를 할 때도 내 가게처럼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죠.”
7월부터 ‘하다’는 다시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일 예정이다. 월요일 저녁엔 맥주를 마시며 함께 단편독립영화를 보는 ‘맥협’, 토요일 저녁엔 직접 키운 무농약 여름 채소로 만든 요리를 선보이는 ‘Summer Veg키친’, 일요일엔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소셜 다이닝이 운영된다.
서로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한 공간을 나눠 쓰는 일은 예상대로 쉽지 않다. ‘하다’를 거쳐간 사람들 중에는 숟가락 하나하나 삶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그릇을 깨도 아무 말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다운씨는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완전히 자기 것처럼 생각하긴 힘든가 봐요. 공간 관리에 관한 매뉴얼을 만들긴 했지만 이걸 너무 강화할 경우 우리가 생각한 취지와 맞지 않을까 봐 겁나기도 해요.”
다운씨와 항아씨는 그래도 ‘하다’ 같은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을 만난 날, 마침 맞은편 매장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항아씨가 “아까워”를 연발했다. “원래 편집숍이었는데 다른 가게로 바뀌나 봐요. 우리 가게에 비해 돈이 몇 배는 더 들었을 텐데…. 기껏 돈 들여서 인테리어 하고 몇 달 뒤에 저렇게 허무는 것 보면 아까워요. 공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으면 저런 낭비도 막을 수 있을 텐데요.”
기회의 배분이 점점 불균형해지는 사회에 ‘하다’는 유연한 방식으로 균열을 낸다. 작은 기회를 쪼갠 자리엔 두 개의 작은 기회가 생긴다. 녹록지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윤리이자 생존법이다. “‘내 꺼’란 생각이 강하면 이런 시도는 할 수 없어요. 내 것인 동시에 저 사람 것이기도 하죠. 같이 함으로써 누리는 즐거움도 커요. 그런 곳에 좀더 가치를 두면 더 많은 기회가 열리는 걸 볼 수 있어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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