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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해서 더 애달픈... 영화 속 아이들의 슬픈 표정

입력
2017.03.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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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피구팀에 자신이 뽑히길 바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소녀

●여행자

아빠가 자신을 버릴 리 없다며…

고개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

●나무 없는 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

소망과 슬픔 뒤엔 무표정만 남아

삶은 모든 단계에서 그 자체로 복잡하고 치열하며 간절하다. 어린 시절도 예외일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미숙함 때문에 생겨나는 게 아니다. 다른 시기들이 그렇듯, 그 시절 역시 고유하고도 절실한 이유로 아프다. 그때를 지나왔다고 해서 어른들이 그 시절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폄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배태되었던 당신의 그 경험은 지금 이 아이의 체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아이들의 아픔은 더욱 사무친다. 처음 베인 상처가 가장 깊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은 어떤 것일까. 내게 그것은 혼자 조용히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다. 지난 10여년 사이에 나온 한국 독립영화들에서 아이들의 슬픈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고요해서 더 애달픈 그 표정들.

그림 2영화 '우리들'은 두 소녀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 관계를 탐색한다.
그림 2영화 '우리들'은 두 소녀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 관계를 탐색한다.

‘우리들’

구기 종목 중에서 가장 절박하고도 잔인한 경기는 단연 피구일 것이다. 축구 야구 농구 하키를 포함한 대부분의 구기 시합은 특정한 지점까지 공을 이동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피구는 공이 아니라 사람이 목적이다. 상대 선수를 차례로 공격해서 결국 한 명도 남지 않도록 쓸어버리면 승리한다. 이때 공은 운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상대 선수를 해치우기 위한 무기다. 게다가 피구에선 4개의 방위가 모두 전선이 된다. (한쪽으로만 맞서면 되는 배구와 비교해보라.) 적이 내쏘는 공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도망다녀야 하지만 일단 밖으로 밀려나게 되면 내가 당한 방식 그대로 상대를 공격한다.

그런 전장을 앞에 두고 한 소녀가 서 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첫 장면은 자신이 선택되기를 바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주위를 쳐다보는 한 소녀의 얼굴이다. 피구 경기를 앞두고 양팀의 주장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호명되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소녀를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소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만큼은 외톨이 소녀를 절실하게 지켜본다. 직접 개입할 수 없어 무력하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결코 거두지 않는다. 이제 그 카메라는 아이에게서 무엇을 더 보게 될까.

그림 3영화 '여행자'의 소녀는 입양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짓누르게 될 고독과 자책을 마주하게 된다.
그림 3영화 '여행자'의 소녀는 입양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짓누르게 될 고독과 자책을 마주하게 된다.

‘여행자’

아이는 아빠를 기다리지만 아빠는 오지 않는다. 보육원의 낮은 흐릿하고 밤은 길다. 흐릿하면서 긴 날들이 지나고 또 지나도 아빠가 오지 않자 아이는 마침내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실감한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에서 아이는 결국 자책한다. 상담 도중 의사 선생님이 왜 보육원에 오게 됐는지 아냐고 묻자 잠시 주저하다가 옷핀 때문이라고 답한다. 아빠가 새로 결혼해서 새엄마랑 아기랑 함께 살게 된 후 아기가 귀여워 안아줬는데 때마침 달고 있던 옷핀에 아기가 상처를 입었다고, 그런데 아기를 일부러 찔러 큰 위험에 처하게 했다고 오해 받아 결국 이곳에 온 것 같다고.

아이는 결국 필사적으로 옷핀이라는 이유 하나를 생각해낸 셈이다. 아빠가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아이는 의사 선생님을 단 한번도 바라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설명한다. 잠시 할 말을 찾던 의사는 “아니야. 아빠는 네가 좀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걸 거야”라고 간신히 말해준다. 하지만 삶의 이 어린 여행자는 가슴 깊이 꽂힌 옷핀을 어쩌면 평생토록 뽑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림 4영화 '나무 없는 산'은 버려진 남매의 서러운 사연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림 4영화 '나무 없는 산'은 버려진 남매의 서러운 사연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나무 없는 산’

자매는 엄마를 기다리지만 엄마는 오지 않는다. 정류장에 날마다 나가보지만 도착한 버스에선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낯선 잠자리에서 수없이 뒤척이지만 잠도 오지 않는다.

김소영 감독의 '나무 없는 산'에서 아이들의 얼굴은 흡사 조용히 흐르는 개울물 같다. 구름이 그 위로 비쳐지며 떠가기도 하고 바람이 그 표면을 불현듯 흔들기도 한다. 오지 않는 시간과 고여 있는 공간 속에서 그렇게 소망과 슬픔마저 자매의 얼굴 위에 한동안 어렸다가 흘러가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텅 빈 표정이다.

무표정은 오래 견디는 자의 표정이다. 같은 자리를 부유하며 떠도는 아이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진공 같은 세상에서 길고 느린 시간을 그런 얼굴로 간신히 견딘다. 무표정은 동시에 보는 자의 의도대로 읽어낼 수 있는 표정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을 버티고 버텨 마침내 텅 비어 버린 아이들의 얼굴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이동진 영화평론가·B tv '영화당'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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