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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베트남의 ‘문 대통령’ 공개 비판… 왜?

입력
2017.06.1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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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및 보훈 가족과의 따뜻한 오찬 행사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및 보훈 가족과의 따뜻한 오찬 행사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놓고 일었던 한국과 베트남 정부 간 갈등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14일 한국 외교부가 양국 관계의 중요성과 함께 대통령 발언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자 하루 만인 15일 베트남에서는 관련 소식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베트남 매체는 모두 관영입니다. 특히 관련 인터넷 기사에 달려 있던, 한국에 비판적인 댓글들이 사라진 점에 미루어 베트남이 한국 정부의 ‘사실상의 사과’를 수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발생’ 사흘 만인데, ‘불편한 상황 오래 끌고 가봐야 득 될 게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를 하면서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다”는 말을 했고, 이 소식이 베트남 언론을 통해 현지에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베트남 매체들은 돌아가면서 정치인은 물론, 군인, 일반인 등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반한(反韓) 분위기를 부추겼고, 베트남 독자들은 “한국군의 잔인함을 영원히 기억하자”, “한국 제품 이용하지 말자” 등의 댓글로 격분을 토해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2일 베트남 외교부가 대변인 레 티 투 항 명의의 성명을 자체 홈페이지에 게재하면서 전해졌습니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양국 우호와 협력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베트남 정부가 외국 정상의 발언을 놓고 불만을 표시한 것인데, 이에 대해 호찌민시에 20년째 거주하고 있는 한 교민은 “한국 대통령의 발언에 이처럼 베트남 정부가 직접 나서서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트남 정부의 이번 불만 표시가 대단히 이례적이라는 것입니다.

베트남 정부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대내외적 의미를 함께 지닙니다. 우선 액면 그대로, 한국 정부에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한국 정부에 공을 넘겼다는 데 의미가 있고, 대내적으로는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에 이렇게 이야기 했으니, 흥분하고 있는 언론과 국민은 이제 한국 비판을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입니다. 실제 베트남 외교부의 성명 이후 관련 기사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한국군의 잔혹상을 주로 알리는 댓글 중에 “이제 삼성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것 아니냐”며 양국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반응까지 띄기도 했습니다. 감성이 아니라, 실리를 따질 때라는 것입니다.

현재 베트남에는 3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삼성 관련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우방국임을 감안하면 그 만큼 베트남 정부에서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셈입니다. 그 조치가 바로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 홈페이지 게재였던 것입니다. 베트남 외교부는 이보다 사흘 앞선 지난 9일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항의의 뜻을 전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관영 매체를 통한 여론전, 외교부 대변인 성명 게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정부가 문 대통령의 발언처럼 과거사와 관련해 민감하게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30여년의 전쟁을 통해 통일은 이루었지만 곳곳의 상처들이 아물지 않았고, 국민 통합을 이뤘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입장을 가진 국민을 한데 아울러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정부가 택하고 있는 입장이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Khép lại quá khứ, hướng tới tương lai)로 대변되는 실용주의입니다. 1980년대 경제 개방ㆍ개혁을 목표로 한 도이머이(쇄신) 정책 시행 당시 나온 것인데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효합니다.

특히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과 관련, 베트남 정부는 한국 정부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있으며 시민단체 등 한국인들의 사죄와 사과 움직임에도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미국을 상대로 해서 이긴 전쟁이고, 한국은 미군의 용병으로 참전했던 나라다. 미국도 가만히 있는데 한국이 왜 그러느냐’는 반응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베트남 정부는 1992년 한국과의 수교 당시에도 “우리가 승전국”이라며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던 나라입니다. 외교 관계에 있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베트남 정부의 고민과 그에 따른 입장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과거의 일에 고개 숙이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이례적이긴 하지만 베트남전과 관련해서 베트남 정부가 민감하게 나온 경우가 처음은 아닙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베트남전쟁 참전자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관련 법률 개정안에서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와 고엽제 후유증의증 환자들을…” 이라는 내용의 조문을 문제 삼은 바 있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있었는데, 정부는 반한 감정이 고조될 것을 우려해 해당 법률 조문에서 ‘월남전쟁’을 뺀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유공자와 고엽제 후유증의증 환자들을…”로 바꾼 적도 있습니다.

청와대가 베트남의 이런 사정과 해프닝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 추념사에는 보다 세련된 문구가 등장했을 것입니다. 참전용사들을 예우하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베트남 국민을 자극하지 않는 것으로 말입니다.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특사까지 파견하며 베트남에 큰 관심을 표했고, 베트남 내에서도 큰 호응을 얻어내며 집권 초반 양국 관계 발전에 청신호를 올린 문재인 정부였지만, 이번 일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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