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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 되살려 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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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재판의 역사적 의미 되살려 줘서 감사합니다”

입력
2018.07.11 15:26
수정
2018.07.11 19:1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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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장

영화 ‘허스토리’ 김희애 실제 모델

“위안부 할머니 삶 접하고 부끄러워

나부터 진실 알려야겠다고 결심”

1992년부터 6년간 사비 들여 소송

1심서 사상 첫 日 배상판결 받아내

“죽을 때까지 日 사과 요구할 것”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장이 10일 관부재판 기록 등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료를 모아 사비로 전시하고 있는 부산 수영구 ‘민족과 여성 역사자료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장이 10일 관부재판 기록 등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료를 모아 사비로 전시하고 있는 부산 수영구 ‘민족과 여성 역사자료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왜 그렇게 힘겨운 재판을 벌여야 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재연해줘 너무 감사합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 ‘허스토리’를 본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김문숙(91ㆍ사진) 회장은 “영화를 보니 감회가 새롭고 ‘관부(關釜)재판’을 했던 그때가 생각 나 많이 울었다”면서 “일반인이 봐도 이 재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게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과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 등 총 10명의 할머니들이 오직 본인들만의 노력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청구한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다. ‘시모노세키 재판’이라고도 불리는 이 재판의 공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이다.

영화 속 배우 김희애가 열연을 펼친 문정숙 사장의 실제 인물이 바로 김 회장이다. 1980년대 후반 여행사를 운영한 김 회장은 “당시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기생관광을 많이 왔는데 그때 그들을 통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면서 “그래서 기생관광 반대시위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위안부 문제와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회고했다.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었던 그는 1991년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해 전국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당시 위안부 할머니를 비롯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등 250여명을 찾았는데, 그 중 10명을 이끌고 관부재판에 참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려 6년에 걸쳐 23번이나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재판을 진행한 김 회장은 자신이 여행사를 하며 모은 돈을 재판 비용에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대학까지 나오고, 사업도 하면서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접하니 같은 시대에 태어나 나만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면서 “지금 나부터라도 이 사람들을 껴안고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회장과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일본인들이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라는 후원모임을 결성했고, 13명의 일본 변호사들이 무료 변호인단까지 꾸려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재판을 위해 일본에 올 때마다 다양한 지원에 나섰다.

이런 힘들이 모여 김 회장과 할머니들은 1998년 4월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재판부로부터 ‘일본정부가 원고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명에 각각 30만엔, 모두 90만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판결을 얻어내게 된다.

김 회장은 “관부재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을 발칵 뒤집을 만큼 의미 있는 결과를 낸 재판이지만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서 잊혀져 왔다”면서 “1990년대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소송을 벌였으나 유일하게 관부재판만 일부 승소를 거뒀고 국가적 배상을 최초로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사죄 청구에 대한 요청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근로정신대 원고인 7명의 청구에 대한 소송은 기각했다. 1심 일부 승소판결 이후 재판부는 경질됐고, 일본정부는 즉각 항소했다. 이후 5년에 걸친 항소와 상고 끝에 2003년 최고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판결이 뒤집혔으며, 지난해 4월 관부재판에 참여했던 마지막 원고 이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재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재판은 끝났지만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라는 김 회장은 2004년 관부재판 기록을 비롯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료를 모두 모아 사비로 부산 수영구에 ‘민족과 여성 역사자료관’을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생이 다할 때까지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겠다”는 김 회장은 “더불어 우리의 아픈 과거 역사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알리는 데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부산=글ㆍ사진 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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