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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충성스러운 반대자가 있는가

입력
2017.08.2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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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m

“그는 고집불통”이라고 왕이 불평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유일하게 기록된 인물이 허조라는 사람이다. 다른 임금도 아닌 세종이 고개를 저었으니 얼마나 꼬장꼬장한 관리였는지 알만하다. 그는 주장하면 물러섬이 없는 원칙주의자로 임금이나 중신과 다르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세 사람들은 소수의견이나 충성스러운 반대자라 평하지만 실록에 드러난 언행을 보면 그는 권력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균형론자다. 사건에 연루된 언관을 벌하려 하자 임금의 눈과 귀이며, 간언(諫言)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허조는 백성이 관리를 고소하는 일도 반대했다. 백성의 고소로 관리의 오판을 처단하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었다. 세종은 약한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게 이치에 맞느냐고 반박했다. “고집불통”이라는 세종의 푸념도 재임 초기부터 10년 이상 계속된 그와의 ‘부민 고소’ 논쟁에서 비롯됐다. 세종은 소장을 수리해 처리하되 그 소장 때문에 관리를 죄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무고나 관리의 판단을 문제 삼는데 따른 부작용을 감안한 세종다운 절충이다.

열린 군주가 아니었다면 진작 내쳐졌을 터이지만 세종은 발목만 잡는 허조를 위대한 재상 황희만큼 총애했다. 졸기는 허조가 “간(諫)하면 임금이 행하고, 말하면 들어줬으니 한이 없다”며 웃으면서 숨을 거뒀다고 전한다.

이 정부에, 청와대에 허조 같은 인물이 있는지 궁금하다.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 달성에 필요한 예산 178조원과 필요한 재원 마련에 여러 논란이 제기된다. ‘코드 인사’ 논란에 ‘말로만 통합’이라는 빈정거림이 들린다. 보수 10년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봐도 아닌 인사가 정권의 힘을 빼는 일이 잦다. 왜곡된 성 관념으로 인해 사퇴 압력이 컸던 청와대 행정관은 ‘소통’ 이벤트 능력을 높이 산 때문인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청와대가 요지부동이다. 대선 보은인사와 정치편향으로 진작 시비거리가 됐던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살충제 계란이 몰고 온 파도에 얕은 능력을 드러내고 말았다. 정권 초기임을 감안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말이 뒤집히고, 허둥대는 정부의 혼란은 위태롭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출범 100일을 기념한 국민보고대회에서 “국민의 집단지성과 함께 하는 게 국정을 성공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국민과 끊임없이 소통하겠다”고 말했다. 그 집단지성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끼리의 지성이어서는 곤란하다. 이전 정부가 겪었던 집단적 사고 오류를 되풀이할 게 분명하다.

청와대의 집단적 사고와 객관적 상황인식의 괴리가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21일 국회에서 문제가 된 청와대 행정관과 관련해 “사퇴 건의는 했으나 결과에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식약처장 책임 문제와 관련해 “일정시점까지 업무장악이 안될 경우 (거취 문제를)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부처장의 업무능력을 더 두고 보겠다는 것인데, 일국의 부처가 동네약국이나 구멍가게도 아니고, 국민이 실험 대상도 아닌 바에야 할 수 없는 얘기다.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를 10년간 지낸 허조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이 좋아하는 사람만 쓴다더라”는 세종의 말에 “그렇습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현명하고 재주가 있다면 친척이라도 꺼리지 않습니다만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어찌 사사로이 친한 자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했다. 허조는 특정인을 후보로 뽑는 간택, 이조 내에서 논의하는 평론, 조정 안팎의 평판을 듣는 중의 3단계 인사검증을 했다. 국조인물고에서는 허조의 엄한 검증에 청탁이 없어졌다고 전한다. 집현전 학사들이 대개 허조가 건진 인재들이다. 한번 쏜 화살은 다시 거둬들일 수 없다. 이 정부에, 청와대에 충성스러운 반대자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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