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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함ㆍ아련함ㆍ달콤함…횡성 시간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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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함ㆍ아련함ㆍ달콤함…횡성 시간의 풍경들

입력
2017.09.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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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우천면 ‘미술관 자작나무숲’ 매표소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들. 뱀을 없애기 위해 키운 고양이가 10여 마리로 불어나 산책로 곳곳에서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횡성=최흥수기자
횡성 우천면 ‘미술관 자작나무숲’ 매표소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들. 뱀을 없애기 위해 키운 고양이가 10여 마리로 불어나 산책로 곳곳에서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횡성=최흥수기자

시간은 공평하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은 지구 행성의 모든 생명에 공통으로 주어진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이 쌓인 모양과 색깔은 제 각각이다. 그래서 누구의 시간에는 짙은 향기가 배어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에는 아련한 추억이 묻어난다. 켜켜이 쌓인 세월, 결이 다른 강원 횡성의 시간 여행지를 소개한다.

26년 가꾼 편안한 휴식처, 미술관 자작나무숲

햇살 좋은 가을날 오전, 우천면 ‘미술관 자작나무숲’ 입구에 도착하자 고양이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몰려들었다. 자신들의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들일 수 없다는 듯 도도한 자태다. 자작나무숲에 고양이라….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지만, 나름 사연이 있다. 처음에 뱀을 퇴치할 목적으로 몇 마리 ‘풀어 놓은’ 게 지금은 10여 마리로 불어났다.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도 아니고, 먹이만 주고 저 좋을 대로 내버려 두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숲 지기인 원종호 관장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은근히 집사 노릇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뱀이 없어진 건 좋은데, 다람쥐와 때로는 비둘기까지 잡아 곤란할 때도 있습니다. 허허”

입구에서 ‘스튜디오 갤러리’에 이르는 길에는 자작나무보다 복분자 줄기가 두드러진다.
입구에서 ‘스튜디오 갤러리’에 이르는 길에는 자작나무보다 복분자 줄기가 두드러진다.
자작나무와 복분자딸기가 어우러진 곳에 보라색 의자를 놓았다.
자작나무와 복분자딸기가 어우러진 곳에 보라색 의자를 놓았다.
스튜디오 갤러리 창으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스튜디오 갤러리 창으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스튜디오 갤러리는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원종호 관장의 사진 작품과 자작나무로 만든 소품으로 장식했다.
스튜디오 갤러리는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원종호 관장의 사진 작품과 자작나무로 만든 소품으로 장식했다.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6㎞, 작은 개울이 휘돌아 나가는 물 머리에 자리 잡은 자작나무숲은 무려 3만3,000㎡(1만평)가 넘는 규모다. 왜 하필 자작나무일까? 서양미술을 전공한 원종호 관장은 백두산 자작나무숲에서 받은 ‘쇼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순백이 내뿜는 기운에 압도돼 천지(天池)를 보지 못해도 상관없었고, 이제 더 이상 여행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내면을 찾아 헤매는 과정으로 여겨 온 여행을 포기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고향 땅에 꼭 자작나무숲을 가꾸겠다는 각오도 그때 다졌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1991년 묘목으로서의 가치가 없어 산림청에서 폐기하는 1만2,000그루의 작은 나무를 구해 심은 게 시작이었다. 그러나 북방 고산지대에 자라는 자작나무는 생육환경이 맞지 않아 절반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후 1,000주의 우량 묘목을 추가로 구입해 심어 현재 4,000그루의 크고 작은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화전민이 밭을 일구던 터여서 뽕나무 느티나무 등도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매표소를 통과해 ‘스튜디오 갤러리’에 이르는 산책로에는 아래로 늘어진 복분자 줄기도 어우러져 있다. 복분자나무 껍질에는 하얀 분가루가 묻어 있어,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이면 자작나무와 함께 이 숲을 하얗게 장식한다. 수직으로 뻗은 자작나무와 곡선의 복분자 넝쿨이 조화를 이룬 모습은 더 없는 사진작품 소재다. “흰색은 가장 밝은 색이죠. 햇볕이 비칠 때 흑과 백의 강렬한 대조가 큰 매력입니다. 쌀쌀한 겨울날 흰 빛에는 차갑지만 애잔한 끌림이 있습니다.” 원 관장의 흰색 예찬론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자작나무 숲 산책로. 26년 가꾼 숲이 울창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용함 호젓함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자작나무 숲 산책로. 26년 가꾼 숲이 울창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용함 호젓함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상설전시장에는 원종호 관장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상설전시장에는 원종호 관장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이 볼수록 매력적이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이 볼수록 매력적이다.
자작나무숲 산책로. 갤러리와 숲을 걷다 보면 한나절은 금방 지나간다.
자작나무숲 산책로. 갤러리와 숲을 걷다 보면 한나절은 금방 지나간다.
외부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제2전시장. 자작나무와 어우러진 건물 자체도 작품이다.
외부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제2전시장. 자작나무와 어우러진 건물 자체도 작품이다.

그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2~3시간씩 숲을 다듬는 일에 몰두한다.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손이 많이 가지만, 따로 사람을 쓰지 않는다. 정원을 가꾸는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고, 그 방식은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편안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밀한 계획보다는 즉흥적인 작업이 많다. 저절로 자라난 풀과 나무를 제거할지 말지도 작업하면서 결정한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긴다면 효율성만 앞세울 게 틀림없고, 깔끔하게 다듬을 수는 있겠지만 자연스러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관 자작나무숲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스러움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스튜디오 갤러리’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셔도, 2개의 전시장과 숲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걸어도 편안함이 느껴진다.

건물 앞에 놓은 파스텔 톤 의자가 앙증맞다.
건물 앞에 놓은 파스텔 톤 의자가 앙증맞다.
원종호 관장이 숲을 가꾸는 자세가 글귀에 배어 있다.
원종호 관장이 숲을 가꾸는 자세가 글귀에 배어 있다.

2만원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입장료에는 차 한 잔 값과 갤러리 관람료 외에, 일상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조용함 호젓함 여유로움을 누리는 대가가 포함돼 있다. “세상에 빨리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의 말처럼 이 숲도 나무가 자라는 만큼만 아주 천천히 변해갈 것이다.

꼬깃꼬깃한 시간이 쌓인 곳, 올챙이추억전시관

새말IC에서 약 15km 떨어진 둔내면 궁종리 산골 자락에는 꼬깃꼬깃하게 쌓다 못해 바스러질 것 같은 시간의 편린을 모은 ‘올챙이추억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성세대는 올챙이 적 추억을 떠올리고, 젊은 세대는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신혁철(80)ㆍ이예숙(75) 부부가 젊은 시절부터 수집해 온 온갖 생활물품을 전시한 곳이다.

올챙이추억전시관의 오래된 교실. 책가방 도시락 등이 7080세대의 향수를 자극한다.
올챙이추억전시관의 오래된 교실. 책가방 도시락 등이 7080세대의 향수를 자극한다.
곤로(풍로)와 보온병, 보온밥통 등은 드라마 소품을 모아 놓은 듯하다.
곤로(풍로)와 보온병, 보온밥통 등은 드라마 소품을 모아 놓은 듯하다.
추억을 회고하는 기사도 ‘추억팔이’ 상품.
추억을 회고하는 기사도 ‘추억팔이’ 상품.

중고등학생의 교복, 책가방, 도시락, 책걸상과 칠판은 전시실 전체를 1970~80년대 교실로 꾸미고도 남는다. 방 한 칸을 가득 메운 풍로(곤로)와 보온물병, 보온밥솥 등은 ‘응답하라’ 유의 드라마 소품을 모아 놓은 듯하다.

로보트 태권V와 아톰 포스터, 종이인형 옷 입히기와 딱지 등은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겐 생소한 물건들이다. 신문 스크랩도 전시하고 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이 너덜해진 신문 한 조각에는 ‘사라져 가는 풍물’ 시리즈가 실렸다. ‘먼 먼 추억의 눈송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목화밭과 길쌈하는 아낙의 사진이 큼직하다. 옛 추억을 들추는 기사마저 ‘추억팔이’ 소재가 된 아이러니다.

미싱과 괘종시계 남포등이 있는 풍경.
미싱과 괘종시계 남포등이 있는 풍경.
흑백TV와 옛날 생활용품이 뒤섞여 있다. 체계적인 디스플레이가 아쉽다.
흑백TV와 옛날 생활용품이 뒤섞여 있다. 체계적인 디스플레이가 아쉽다.
한국일보 제물포지국 현판은 왜 이곳에 있을까.
한국일보 제물포지국 현판은 왜 이곳에 있을까.

신씨 부부가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18년 전이다. 그동안 작은 연못을 파고, 서너 채의 전시관을 짓고, 정원을 일군 노력이 적지 않았다. 이예숙씨는 나이가 들면서 관람객 앞에 나서는 것도 점점 꺼려진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아들이 자주 내려와 관리한다지만 수집한 물건이 너무 많다. 연도와 종류별로 분류해 체계적으로 전시하지 못하고, 잡동사니처럼 창고에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은 특히 안타깝다.

잊혀진 경강로 되살린 안흥찐빵

새말IC에서 멀지 않은 안흥은 한때 횡성 못지않게 번화한 곳이었다. 문재를 사이에 두고 평창 방림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안흥은 서울과 강릉을 잇는 경강로의 주요 길목이었다. 차도 사람도 대관령을 넘기 전에(혹은 넘어와서) 힘을 비축하는 곳이었기에 숙박업소와 식당이 넘쳐났다. 영동고속도로 개통 이후 잊혀져 가던 안흥은 찐빵으로 다시 부활했다. 안흥면에만 19개 찐빵 업체가 성업 중이고, 그중 11개 곳은 국산 팥만 사용해 직접 빚는 손 찐빵을 고집하고 있다.

안흥의 19개 찐빵 업체 중 11곳은 아직까지 손으로 빚는다.
안흥의 19개 찐빵 업체 중 11곳은 아직까지 손으로 빚는다.
찌기 전 방바닥에서 숙성과정을 거친다.
찌기 전 방바닥에서 숙성과정을 거친다.
손으로 만드는 안흥찐빵의 고물은 모두 인근에서 생산하는 국내산 팥을 사용한다.
손으로 만드는 안흥찐빵의 고물은 모두 인근에서 생산하는 국내산 팥을 사용한다.

안흥찐빵은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시작한 축제가 어느덧 11회를 맞는다. 다음달 13~15일 열리는 축제에선 ‘빵양과 팥군’ 캐릭터를 앞세워 찐빵 만들기, 찐빵 경매, 커플 찐빵 예쁘게 먹기(안전을 고려해 빨리, 많이 먹기는 하지 않는다)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인근의 도깨비도로 체험과 주천강 생태탐방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횡성=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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