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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988과 2018, 오래된 꿈과 새로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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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988과 2018, 오래된 꿈과 새로운 꿈

입력
2018.01.07 11:1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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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나는 대기업 계열 광고대행사에 갓 입사한 1년차 카피라이터였다. 호황기였던 덕에 어찌어찌 회사라는 조직의 책상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 ‘매판자본 물러가라’는 구호가 물결치던 캠퍼스에 있다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를 만드는 일이 영 불편했다. 무엇보다 꽃 같은 청춘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해 죽고 지식인과 종교인의 시국선언이 이어지는 암울한 시국에 인간 욕망을 자극하여 당장 지갑을 열라고 부추기는 광고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는 전두환 정권의 4ㆍ13 호헌 선언 이후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날마다 이어졌다.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사경을 헤매면서 시위는 대학 교정 안에서만 그치지 않고 거리로 번졌다.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직장인들이 퇴근 후 시위에 동참했다. 입사 동기들은 퇴근 후 종로나 시청앞, 광화문으로 나가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가 늦은 밤 옷에 최루탄 냄새를 묻히고 회사 근처 카페에 다시 모였다. 무용담처럼 그 날의 싸움을 얘기하고, 앞날을 전망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마침 그 카페 안에는 기타가 한 대 있었다. 아직 학생티를 벗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한 잔 술과 운동가에 광고쟁이가 된 부끄러움을 숨겼다.

그 해 6월 뜨거운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6ㆍ29선언이 발표되었고, 나와 동기들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회사에서 우리들은 한 해 선배들과 함께 광고회사 최초 노조를 만들었다. 조금은 좋은 세상이 된 것 같은 뿌듯함도 있었다. 12월 첫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민주화 진영이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는···.

30년이 훌쩍 흐른 뒤 그 시절을 소환한 영화 ‘1987’을 보았다. 박종철을 고문하는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가렸고 한열이가 쓰러질 때는 눈물 때문에 눈을 감았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스무 살이 억울했다. 그들의 죽음 후로도 30년 동안 툭하면 뒷걸음질 치는 역사가,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한심하고 원통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2017년 겨울의 촛불과 봄날의 정권교체를 생생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1988년에는 시작도 못했던 적폐청산이 2018년에는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는 부끄러웠지만 지난 30년 내 밥벌이가 되어준 광고 한 편에서 2018년에도 유효한 희망의 메시지를 읽는다. 광고에는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한 20대 아들이 나온다. 모나미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일기에는 ‘우리가 무모했던 걸까?’하는 절망이 적혀있고, ‘이룬 적이 없다고 이룰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다짐도 써있다. 아들은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운동화 끈을 매면서 청년시절 아버지의 꿈과 지금 청년인 자신의 꿈이 다르지 않음을 잔잔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아들O.V) 아버지의 일기를 보았습니다.

용감하고 뜨겁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스무 살 청년이 거기 있었습니다.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그와 지금의 나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여NA) 오래된 꿈과 새로운 꿈이 나란히, 앞으로.

가능성의 릴레이.

(SK텔레콤_TV CM_2013_카피)

올해 우리나라는 88올림픽 개최 후 30년 만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한다. 1988년 꿈꾸었던 북한의 올림픽 참가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2018년 동계올림픽에 북한은 참여의사를 밝혔다. 30년 전의 오래된 꿈과 지금 현재의 새로운 꿈이 나란히 앞으로 나가고 있는 증거를 보는 것 같아 기쁘다. 새해에는 나도 가물가물한 내 오래되고 낡은 꿈을 꺼내 먼지를 털고 햇볕을 쐬어주어야겠다.

(SK텔레콤_TV CM_2013_스토리보드)http://www.tvcf.co.kr/YCf/V.asp?Code=A000166949

(SK텔레콤_TV CM_2013_유튜브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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