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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혼밥은 죄가 없다

입력
2017.04.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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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주기인 2015년 4월 16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주기인 2015년 4월 16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기서는 홀로이되 더불어, 침묵 속에 식사해야 합니다.”

취재 차 한 봉쇄수도원에 갔을 때다. 신부님은 식사시간이 되자 묵언 규칙을 재차 당부했다. 대형 식탁 여러 개에 나눠 앉은 약 30명의 수도자가 묵묵히 자기 밥과 찬을 입에 넣었다. 앞 사람을 버젓이 마주하고 내 그릇에 코를 묻은 기분이 영 어색해 좀이 쑤셨지만, 건너편을 향해 지긋이 웃거나 눈빛을 발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먹함만 더해질 게 뻔했다.

온 신경이 내 숟가락 소리에 가 있을 무렵, 마이크를 잡은 한 수도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유일하게 허락된 말, 수도생활 규칙서 낭독이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시련 중에 있는 자를 도우라. 과식가가 되지 말라. 험담꾼이 되지 말라. 지난 날의 자기 잘못을 눈물과 탄식으로 고백하고, 그 잘못을 앞으로 고쳐라.”

기분 탓인지 몰라도 느리고 단정한 당부가 계속되자, 오붓한 환담 속의 식사 못지 않은 환희가 생겼다. 거짓 증언 같은 것은 결코 않겠다는 다짐도 국과 함께 꿀떡꿀떡 넘어갔다. 먹는 중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고 타인과 공동체를 염려하는 일이 ‘홀로이되 더불어’ 하는 식사의 핵심이라고, 이를 위해 침묵, 고독, 묵상이 꼭 필요하다고 신부님은 설명했다. ‘홀로이되 더불어’라는 알 듯 모를 듯 한 말이 그 곳에 머무르던 사흘간 마음 언저리를 맴돌았다.

비슷한 경험은 사찰 취재에서도 반복됐다. 마음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이 묵언과 고독 속에 이뤄진다는 이유였다. 홀로 처절히 읽고 생각하고 절하는 가운데 자신이 고집부리던 일, 상처 주던 일, 상처 받던 일을 바로 보고 참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은 겨울과 여름에 세 달씩 절집에 자신을 가두는 안거(安居)에 든다. 때마침 이런 고독의 힘을 간파한 속세에서도 ‘혼밥’ 열풍이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위즈덤하우스) 같은 책의 인기가 식을 줄 몰랐다. 고독을 통해 재능을 벼린 천재들의 사연이나 내성적인 인물들의 성공기도 다시 회자됐다.

이때다 싶어 흥을 내던 혼밥예찬과 고독예찬을 망설이게 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실체와 함께 유난한 ‘혼밥 사랑’이 알려졌을 때부터다. 비상식적 불통 행태의 원인을 혼밥 선호에서만 찾는 것은 어불성설인데도 찜찜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고집한 은둔, 칩거, 불통, 서면보고가 나라를 망쳤다는 증거가 쏟아지는데 ‘고독의 힘’ 같은 말을 써대는 것은 죄스러울뿐더러 설득력도 떨어졌다. 거리의 촛불 시민들은 우아하지만 단호한 몸짓으로 ‘연대의 힘’을 증거하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박 전 대통령 구속을 계기로 한 쪽으로 미뤄뒀던 고독의 의미를 다시 떠올렸다. 형 확정이 어찌될진 몰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또 시작된 마당이다. 18년의 칩거나 가족관계를 생각하면 그에게 고독의 양이 모자랐을 리는 없다. 과거 혹자는 그가 “은둔의 시간을 거쳐 ‘사람보다 원칙을 앞세우는 고독 리더십’을 발휘한다”고 했고, 누구는 그 시간이 ‘선거 여왕’의 자양분이라고 썼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늘 모자랐던 것은 고독 그 자체가 아니라 양질의 고독, 즉 ‘홀로이되 더불어’ 중 ‘더불어’라는 반쪽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라도 가족과 변호인단이 모자란 반쪽의 재건을 도울 순 없을까. 도움이 될 만한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같은 책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문 등 좋은 글이 적잖다.

박 전 대통령이 다시 놓인 고독의 시간을 그렇게 아이들을, 부모들을, 대한민국을, 민주주의를 애도하고 반성하는데 썼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누구처럼 기이한 자기 연민으로 점철된 회고록을 펴내는 일만큼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반대라면 박 전 대통령의 세상은 앞으로도 평생 외로운 감옥일지 모른다.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런 예상을 하는 까닭은 지난 동안거 내내 3평 남짓 방에 스스로를 가뒀던 한 스님의 말이 떠올라서다.

“이제껏 내가 좋아했던 것에만 집착하고 싫어하는 것을 혐오만 하는 편협이야말로 진짜 감옥 그 자체다. 자신을 사로잡는 집착과 혐오를 깨고 자신과 남을 제대로 볼 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감옥에서 나온다.” 내가 잘못 보고 들은 것만 알고 자물쇠 잠그듯 눈과 귀와 마음을 꼭꼭 묶으면, 구치소나 교도소를 피해 어디에 살든 그곳이 감옥일 거라는 얘기다.

김혜영 기획취재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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