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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국가가 짓밟은 진실

입력
2018.08.09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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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6월 서울중앙지법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사형 당한 최을호씨와 징역 9년을 복역한 고 최낙전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른바 ‘김제 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의 재심 결과다. 유족과 함께 싸워온 송소연 진실의힘 상임이사(왼쪽)와 최낙전씨의 아들 원일씨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진실의힘 제공
지난 해 6월 서울중앙지법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사형 당한 최을호씨와 징역 9년을 복역한 고 최낙전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른바 ‘김제 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의 재심 결과다. 유족과 함께 싸워온 송소연 진실의힘 상임이사(왼쪽)와 최낙전씨의 아들 원일씨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진실의힘 제공

기자를 하다 보면 진심으로 똘똘 뭉친 취재원을 한번은 만나게 된다. 내게는 그 중 하나가 송소연(진실의힘 상임이사)이다. 그는 이름도 어려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총무였다. 그가 학생운동 전력으로 유죄를 선고 받는 법정에 “송소연, 힘내라!”라는 웬 어머니들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스물 셋만큼의 담력으로 겨우 버티던 그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알고 보니 민가협의 어머니들이었단다. 출소 뒤 인사나 하자며 찾아갔는데, 그 길로 눌러앉아 간사를 하고 총무가 됐다.

민가협 총무란 자리는, 이를테면 진실의 통로였다. ‘공안’이라는 허울의 가치에 훼손 당한 인간들의 진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길. 수많은 양심수와 그들의 가족에게 동지이자 딸이 됐고, 언론에는 한(恨)이 된 진실의 조각들을 모아 한 줄이라도 기사가 나도록 보도자료를 만들어 제공했다. 1995년부터 매해 ‘국가보안법 적용 실태 보고서’를 썼고, 그 결정판이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보법 적용 인권실태조사 보고서’로 탄생했다.

그러나 현실은 보고서 속 글자보다 더 참혹한 것이었다. 그 절정에 국가폭력 고문피해자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진도 가족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 박동운(73)씨가 그를 움직였다. 전남 진도농협 예금계장이던 박씨의 ‘지옥’은 1981년 3월 시작됐다. 서울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 63일 간 불법 감금돼 고문을 당했다. 그를 끌고 간 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였다. 고문이 조작한 진술은 이랬다.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돼 얼굴도 모르는 부친(박영준)을 따라 두 번이나 북한에 다녀온 24년 고정간첩. 국보법은 자루만 남은 망치와 라디오도 간첩의 증거로 만드는 ‘만능법’이었다. 박씨의 어머니, 남동생, 작은아버지 부부, 고모 부부도 그렇게 간첩이 됐다. 그래도 어떻게 간첩이라는 거짓 자백을 할 수가 있냐고? 세면대에 성기를 올려놓은 뒤 신발 짝으로 내리치고, 라이터로 체모를 태우는 고문까지는 견뎠다. 그가 무너진 건 이런 겁박 때문이다. “간첩이라고 시인하지 않으면, 옆방에 있는 어머니를 네가 보는 앞에서 똑같이 하겠다. 그래도 안 하면, 네 부인을 데려와 알몸으로 이렇게 고문하겠다.” 당시 아내는 셋째 아이를 임신해 만삭이었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떨어져, 1998년 8ㆍ15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17년 5개월이 흘렀다.

박씨의 출소 뒤 재심 청구를 도우려 그를 만난 송소연은 당황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벽에 부딪혔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고문의 후유증이었다. 고통은 과거의 것이 아니었다. 마음부터 치유해야 재심도 가능했다. 한번 본 적도 없는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씨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도와주세요.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박씨를 비롯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 상담이 그렇게 시작됐고, 2005년 9월 국회의 ‘국보법 청문회’ 증언대에 이들이 서기에 이르렀다.

2009년 11월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 받고도 끝이 안 났다.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1ㆍ2심에서 승소했으나, 2013년 대법원은 ‘무죄 확정일로부터 3년 이내’였던 과거사 손해배상 시효를 돌연 ‘형사보상 확정 후 6개월 이내’로 단축했고, 이듬해 최종심에서 배상 판결을 취소했다. 당시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의혹의 양승태였다. 헌법재판소는 조만간 당시 판결의 위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진실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들이 힘겹게 싸우며 족적을 이어오는 동안, 국가는 한 것이 무엇인가. 송소연은 말한다. “국보법으로 당신 같은 고통을 당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답을 들으려고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한시적 특별법으로 태어나 정권 유지의 도구로 악용돼온 이 법은, 올해로 제정 70년이 된다.

김지은 디지털콘텐츠뉴스부 차장

고문생존자들이 ‘치유자’로 나선 진실의힘 치유학교. 2012년 3월 서울 종로구 가회동 노틀담수녀회에서 열린 치유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송소연 진실의힘 상임이사, 고문생존자 김장호ㆍ김양기ㆍ김태룡ㆍ박동운 선생, 정신과전문의인 정혜신 진실의힘 이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윗줄부터 시계 반대 방향). 진실의힘 제공
고문생존자들이 ‘치유자’로 나선 진실의힘 치유학교. 2012년 3월 서울 종로구 가회동 노틀담수녀회에서 열린 치유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송소연 진실의힘 상임이사, 고문생존자 김장호ㆍ김양기ㆍ김태룡ㆍ박동운 선생, 정신과전문의인 정혜신 진실의힘 이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윗줄부터 시계 반대 방향). 진실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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