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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품바의 화려한 부활, 온라인 세상도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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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품바의 화려한 부활, 온라인 세상도 홀리다

입력
2017.10.24 20:0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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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품바 ‘버드리’ 지역축제 스타로

공연 때마다 40~60대 구름 관중

유튜브 영상 3만여건… 조회수 수백만

가수형 품바, 아이돌 인기 뺨쳐

재담ㆍ풍자 뛰어난 품바도 상종가

“춤ㆍ사회비판ㆍ연극 합친 종합예술”

20일 오후 충북 보은대추축제에서 품바 버드리씨가 장구춤을 선보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은=홍인기 기자
20일 오후 충북 보은대추축제에서 품바 버드리씨가 장구춤을 선보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보은=홍인기 기자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잊지도 않고 또 왔네~”

20일 오후 4시30분 충남 보은대추축제 현장.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각설이타령이 흘러나오자, 관객 여럿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족히 500명은 돼 보이는, 대형 천막 4개로 만든 가설무대 앞을 빽빽하게 채운 관객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성 품바 ‘버드리’(본명 최현숙·46)가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와 갈채, 환호성이 무대 주변을 가득 메웠다.

품바 경력만 15년째인 버드리는 지역 축제 ‘스타’다. 그를 보겠다면서 공연을 따라다니는 일부 열성 팬이 있고, 축제장마다 구름 관중을 불러모은다 해서 ‘품바 여왕’이라 불린다. 한 관객은 “옷을 찢어서 알록달록하게 붙여 놓고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웃기는 기존 품바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현란한 춤사위와 구성진 타령, 장구와 북 등을 이용한 타악기 연주가 일품’이라는 게 팬들 평가다.

이날도 버드리를 향한 관객 호응은 뜨거웠다. 입담 자체가 걸쭉하고 관객들을 들었다 내려놓는 솜씨가 노련했다. “보은에 잘생긴 사람이 많다던데, 진짜 많아요”라는 물음에 “여기 있잖아” 답이 돌아오자, “워메~내가 온지 8일째인데 잘생긴 사람 하나도 못 봤어”라고 맞받아치는 식이다.

인기 BJ(Broadcasting Jockeyㆍ방송 진행자)가 진행하는 인터넷방송에 호응하는 시청자가 별풍선을 쏘아대듯, 무대 위로 뛰어 나와 공연비를 선뜻 건네는 관객도 제법 눈에 띄었다. 5만원권을 건네는 50대 중년에게 “본 중에 제일 잘 생겼네, 감사해요”라며 악수를 건네는 버드리 허리춤은 금세 지폐 수십 장으로 두둑해졌다.

20일 오후 충북 보은대추축제에서 품바 버드리가 관객에게 엿, 칫솔, 비누 등의 물건을 팔고 있다. 보은=홍인기 기자
20일 오후 충북 보은대추축제에서 품바 버드리가 관객에게 엿, 칫솔, 비누 등의 물건을 팔고 있다. 보은=홍인기 기자

공연이 한창 달아오를 때쯤, 갑자기 음악이 멈췄다. ‘공연을 더 즐기고 싶다면 물건을 사달라’. 공연장에서는 어지간해서 볼 수 없는,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일종의 ‘절단(切斷) 신공’. “여러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 씨디(CD) 하나 팔아먹고 가려고 한다”고 외친 버드리는 단원들과 함께 바구니를 들고 직접 관객 사이를 누볐다. “복대에 발열 효과가 나서 겨울에 참 좋아, 구경 값으로 사두면 어차피 집에서 다 쓸 거 아녀”라는 입담으로 구매를 권하자, 관객들은 “칫솔!” “비누!”를 외치며 1만원 지폐를 서슴없이 꺼냈다. 시장이나 축제 현장에서 물건을 팔며 펼치는 자유공연을 보통 ‘난장’이라고 하는데 간혹 지나친 호객 행위로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다. 하지만 너스레 떠는 품바 앞에서 관객들은 이를 공연의 일부분으로 느끼는 모습, 모두가 웃음으로 즐겼다.

이날 품바를 보겠다고 축제 현장을 찾은 이들은 40~60대가 대부분. 품바 공연을 보겠다며 천안에서 왔다는 김모(51)씨는 “뇌혈관, 갑상선 질환 때문에 몸이 안 좋은데 새벽에 일어날 때마다 버드리 영상을 돌려 보며 힘을 얻는다”며 “직접 공연 현장에서 보면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에 우울증이 싹 가신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국 각지 버드리 공연을 찾아 인증샷을 남기는 열혈 팬 중 하나다.

친구 4명과 함께 청주에서 왔다는 박순용(60)씨 또한 우연히 영상을 보고 품바 공연에 빠져 들었다. 박씨는 “품바 공연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생활에 활력을 주는 힘이 있다”며 “버드리 보는 김에 축제도 즐길 겸 놀러 왔다”고 했다. 함께 온 친구들도 “어제도 품바 공연 보러 왔다가 시간을 놓쳐 허탕쳤다”며 “품바가 연예인보다 훨씬 낫다”고 입을 모았다. 아내가 공연을 직접 보고 싶어 대구에서부터 찾아 왔다는 부부 팬 등 십수 명은 공연 중간이나 끝난 후에 버드리에게 쫓아가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비단 버드리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중심으로 웬만한 연예인만큼이나 인기를 누리는 품바 가수들도 여럿이다. 품바란 밥을 빌어먹기 위해 전국 장터나 길거리, 양반집 앞에서 박을 두드리며 타령을 하던 각설이를 일컫는 말인데, 요즘은 각종 축제에 분위기를 띄우는 중요한 공연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버드리의 경우 동영상사이트인 유튜브에 올라 온 공연이 영상만 3만여건, 2년 전 포항불빛축제에서 펼친 입담은 누적 조회수 400만건 돌파를 앞두고 있을 정도다. 회원수 2만4,000명 가량의 팬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보은대추축제를 개최한 보은군청 관계자는 “축제 기간에 버드리가 언제 공연하는지 묻는 전화만 백여 통 가까이 받았고 공연을 할 때마다 1,000명 가까운 관객이 모여든다”며 “지역 축제에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품바 공연이 이제 필수”라고 했다.

올해 5월 열린 제18회 음성품바축제 공식 티셔츠. 지난해까지 축제 공식 품바 의상은 누더기 두루마기 형태였다. 음성품바축제 제공
올해 5월 열린 제18회 음성품바축제 공식 티셔츠. 지난해까지 축제 공식 품바 의상은 누더기 두루마기 형태였다. 음성품바축제 제공

당연히 유명 품바 섭외 경쟁이 치열하다. 축제 본 무대에 오르거나 지역 홍보대사로 활약하는 일도 적지 않다. 품바 자체를 주제로 한 축제도 등장하고 있다. 2001년부터 품바축제를 열고 있는 충북 음성군은 올해 5월에는 품바래퍼경연대회까지 개최해 젊은 층 공략에 나섰고, 경기 용인시 한국민속촌이 지난 7월 처음 개최한 팔도품바경연대회에는 관객만 2만여명이 찾았다. 전남 무안군은 2006년부터 전국품바명인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것도 모자라 각설이품바보존회와 함께 아예 품바 원형 찾기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품바가 이처럼 인기를 얻게 된 걸까. 버드리를 포함한 ‘가수형 품바’의 등장을 그 시작으로 꼽는 게 일반적이다. 여장을 한 남성 품바들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등 예전 품바에 질린 중년층들이 한복을 차려 입은 여성 품바가 신명 나게 장구를 치며 춤 추는 모습에 눈길을 주면서부터다. 여기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중년층을 겨냥해 영상 촬영 전문가들을 동원, 공연 영상을 주기적으로 유튜브에 올렸던 홍보 전략도 한 몫 톡톡히 했다는 평가다.

여가수형 품바만 인기인 것도 아니다. 재담에 강하거나, 각설이 등 전통적인 타령을 멋들어지게 뽑아내는 품바도 상종가다. 7월 한국민속촌 팔도품바경연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부부 품바 ‘칠도와 삼순이’가 대표적이다. 품바예술인협회 사무총장도 맡고 있는 남칠도(본명 남기세·48)씨는 아내 삼순씨와 주고 받은 재담을 2012년에 유튜브에 올렸는데, 2015년부터 조회수가 부쩍 오르더니 지금은 550만건에 달한다. 남씨는 “30년 경력에 이렇게 인기를 누리기는 처음”이라며 “품바가 하대 받고 무시 받던 과거와 달리 대중에게 공연인으로 널리 인정받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삶의 희로애락과 구슬픔, 시대에 대한 풍자를 담은 품바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남씨. 실제 그는 무대에 서면 각설이타령이나 사모곡 같은 전통 타령은 물론이고, 때에 따라선 정치 풍자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대중화하는 품바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트로트나 부르는 것이 무슨 품바냐”라는 비아냥, “난장에서 물건 파는 것에만 혈안이다”는 지적 등이 그렇다. 각설이품바보존회 조순형 회장은 “장터를 돌아다니며 일종의 언론 역할까지 담당했던 옛날 각설이와 달리 요즘 품바들에게 시대를 풍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그 중 전통 각설이타령을 제대로 부를 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냐”고 꼬집었다.

이와 별개로 품바를 문화 전통으로 복원하려는 이들은 ‘난장 각설이’가 아니라 역사 고증을 통한 원형 그대로의 각설이 모습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일례로 품바의 고장, 전남 무안군 일로읍에서는 각설이품바보존회가 구전으로 내려온 각설이타령을 복원해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장털보’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품바 영상 촬영자 장영탁씨는 “전통 소리꾼의 타령 소리가 잊혀서는 안 된다”며 “어깨춤을 추고 흥을 내더라도 가슴 속에는 한 맺혀 눈물 흘리는 것이 진정한 품바의 묘미”라고 말했다.

이윤선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는 “각설이 공연은 춤, 사회비판적 요소, 연극적 요소가 합쳐진 종합예술”이라며 “장터에서 열리는 품바패 공연 또한 넓게 보면 각설이패 전통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시민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담아 둔 부끄러움과 답답한 울분을 밖으로 끌어내 해소해주는 품바에 다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은=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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