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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숫자가 본질이 돼선 안 될 것들

입력
2016.07.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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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경제부처를 담당하다 보니 숫자를 다루는 것이 일상이다. 처음엔 조(兆) 단위 금액을 소수점 처리하는 경제부처들의 ‘스케일’에 놀랐다. 보고서나 보도자료에 1조5,000억원이라 하지 않고 1.5조로 표시하는 관행 말이다. 그런 자료를 매일 접하다 보니 스스로도 이런 표현에 익숙하다.

이렇게 단순화된 숫자에 길들여지면 숫자 이면에 숨은 사람의 고통과 고뇌, 애환을 놓치기 십상이다. 특정 분야 정부지출이 1.5조에서 1.4조원으로 감소할 때, 0.1단위에 불과한 그 작은 차이에는 100,000,000,000원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며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할 수천 수만 사람의 한숨이 숨어 있다.

지난 주 발표된 투자활성화대책 때, 숫자만 보다가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말았다. 정부는 이 대책에서 반려동물 산업을 5대 신산업 중 하나로 삼아, 지금의 ‘1.8조원’인 시장 규모를 2020년까지 ‘5.8조원’으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반려동물 산업을 키우는 데 도움 될 만한 정책 지원, 규제 완화가 많이 들어갔다.

대책을 처음 봤을 때는 이질감이 없었다. ‘GDP엔 도움 되겠네’ 정도의 생각뿐. 그런데 한 동물보호단체에서 낸 성명을 읽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정부 발표는 동물을 오직 상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란 지적이었다. 그래서 다시 자료를 읽어봤다.

먼저 “온라인 판매를 허용한다”는 부분. 거래 편의를 위해 온라인 플랫폼을 열어주면, 분명 매매 건수가 늘고 소비지출이 활발해져 전체 부가가치를 늘리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대책에서 빠져 있는 목적어는 바로 생명체다. 살아 있는 개와 고양이, 토끼, 햄스터, 기니피그가 인터넷 쇼핑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고 파는 것이 쉬워진 대량소비사회는 소비자에게 분명 편익을 제공한다.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다음날 주문한 물건이 집으로 도착한다. 물론 이 대책이 동물을 택배로 실어 배달까지 시키겠다는 식의 극단적 편의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옷을 주문하듯 가방을 사듯 “예쁘다”는 생각에 반려동물을 충동적으로 구매할 가능성은 분명 높아진다. 고민 없이 샀다가 기르기 어렵다고 후회하면 유기와 학대 문제가 늘 수밖에 없다. 실물이 맘에 안 든다며 반품하자고 나오면 어쩔 것인가?

“반려동물 경매업을 신설한다”는 대책도 그렇다. 돈을 더 내는 사람에게 소유권을 주겠다는 얘기다. 돈을 더 내면서까지 가져 갈 이가 더 좋은 양육환경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하겠지만, 삶을 함께 할 ‘반려자’를 얻으려 돈경쟁을 하는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아, 반려동물을 기르는 이들의 처지나 고충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짐작하건대 그들의 마음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식 같은 존재에 관한 일을 ‘산업화’하고 ‘거래’를 편하게 해 주며 거기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접근에, 그들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이번 대책을 위해 경제부처들이 많은 고민을 했다. 수출이 부진하고 내수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산업을 발굴하는 일은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숫자만 보다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를 놓쳤다. 적어도 반려동물에 관한 내용을 부가가치 창출이 목적인 ‘투자활성화 대책’에 넣지는 말았어야 했다. 반려동물 보호나 존엄성 확보를 위한 별도 대책 형태로 나왔어야 했다. 동물 보호와 관련해 미비한 규제들을 다듬고 반려동물을 책임 있게 키울 만한 환경을 만들면, 숫자(산업 규모)는 당연히 따라온다.

돈과 숫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됐지만, 때론 숫자로 접근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여전히 세상엔 많다. 숫자로만 승부를 보려는 이들은 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쉽게 넘어버린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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