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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문재인 대통령에게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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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문재인 대통령에게 바랍니다

입력
2017.05.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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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혹시 컴퓨터 키보드의 첫 번째 글쇠를 기억하십니까? Q와 ㅂ, 아닙니다. 1과 !도 아닙니다. 기능키인 F1도 아니지요. esc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화면에서 벗어날 때 쓰는 글쇠죠. 탈출을 뜻합니다.

우리나라에는 ESC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의 약자입니다. 우리말로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과학과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ESC 회원 일동은 대통령님의 당선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합니다. 그리고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새 정부는 지난 정권이 저지른 잘못을 청산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님, 과학은 현대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초요소입니다. 하지만 과학은 여전히 경제 발전의 도구 또는 삶과 유리된 특수한 지식 체계로 받아들여질 뿐이지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거 기간에 대통령께서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발전, 사람에게 투자해 이루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의 과학기술 공약을 내놓으셨습니다. 아마 ‘사람이 먼저다’라는 지난 18대 대선 후보 시절의 슬로건을 과학기술인에 적용한 것이겠지요. 이 슬로건은 ESC가 제기하는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ESC가 꿈꾸는 변화는 기존의 과학자보다는 과학계의 소수자에서 나올 가능성이 더 큽니다. 대통령님께서는 후보 시절에 이 문제에 대해 ESC가 드린 질문에 답하시면서 근로계약과 4대 보험에서 소외된 학생연구원과 비정규직 연구자들, 그리고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의 위험에 노출된 여성 연구자들이 대표적인 소수자라는 인식을 보여주셨습니다. 후보 시절의 인식이 대통령님의 정책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점이 과학과 기술의 결과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 과학기술인들은 가슴이 아픕니다 핵발전소의 위험성, 미세먼지와 식품의 안전성, 가습기 살균제 사건, 4대강 사업, 천안함과 세월호 진상 규명 같은 주제는 과학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지만 많은 경우에 과학기술인들은 눈을 감고 외면했습니다. 과학기술인의 책임이 큽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과학의 결과를 편의적으로 이용만 하려는 권력과 과학 전문가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도 함께 나누어 져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과학의 결과를 사회 안에 효율적으로 수용하는 지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통령님의 과학기술 관련 공약 중 가장 두드러진 키워드는 바로 4차 산업혁명일 것입니다. 대통령님을 지지하는 과학기술인들이 가장 뜨악해하며 받아들였던 키워드 역시 바로 그것입니다. 자칫하면 과학과 기술에 대한 환상과 막연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구호에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같은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과장된 표현과 화려한 포장은 국민을 현혹시키고 결국에는 실망만 안겨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현장의 연구자들과 이것을 생산해 내는 기업이어야 합니다. 정부는 개별적인 연구자가 갖기 어려운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유지하고, 연구자들을 위한 인프라를 확충하고 법과 정책으로 기업을 뒷받침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과학 연구에 개입하는 대신 조정자의 역할을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지난 5월 10일 발표한 ‘ESC가 새 정부에 바란다’라는 성명서를 요약한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의 성명서가 대통령님께 도달했을 것 같지 않아서 이렇게 신문 칼럼을 빌렸습니다

저는 한 가지 덧붙이려고 합니다. 바로 실패입니다. 과학자는 매일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가설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가설에 따라 관측, 관찰, 실험하는 데 실패하지요. 심지어 자신의 실험 결과로 나온 데이터를 분석하여 논문을 쓰는 데도 실패합니다. 매일 실패를 반복하다가 어쩌다 한 번 성공합니다. 어쩌다 한 성공이 우주를 해석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기술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과학은 실패를 먹고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도전하지 않는 것이지요. 남들이 해 놓은 것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의 과학과 기술을 복사하며 따라가는 게 좋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남들이 아직 하지 않은 것을 해야 과학과 시장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길은 실패로 점철되는 길입니다.

대통령님은 과학자들이 맘대로 실패할 수 있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격려 받으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실패는 과학자의 몫입니다. 정치는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과학자는 실패를 반복하면서 도전하겠습니다. 대통령님은 오직 성공의 길로만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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