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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핵심은 텍스트를 깊이 읽고 맥락을 찾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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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핵심은 텍스트를 깊이 읽고 맥락을 찾아내기”

입력
2018.05.31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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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한국어는 ‘제3의 언어’

무작정 매끄러운 번역에 반대

텍스트의 독특한 느낌 살려야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전문대학원 교수를 29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그는 "옳은 것을 따지는 일에서 좋은 것을 가래내는 일로 번역 논의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전문대학원 교수를 29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그는 "옳은 것을 따지는 일에서 좋은 것을 가래내는 일로 번역 논의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그의 직업은 번역가다. 세상은 전문 번역가라고 부른다. ‘전문’은 ‘믿어도 되는’의 뜻으로 매긴 인증의 말이다. 출판사가 믿고 맡기고, 독자가 믿고 읽는 ‘영어 책 전문 번역가’인 정영목(58)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그가 책 두 권을 ‘지어’ 냈다.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와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제목대로, 번역과 소설∙작가가 각각의 주제다.

옮긴이에서 지은이가 된 사연을 들으려 29일 정 교수를 인터뷰했다. “책 내고 축하받았다. 고맙긴 한데, 사실 싫다. 지은이가 된 게 무슨 영전인가. 내가 기분 나빠해야 정상이다. 나를 부정하는 거니까.” 꼿꼿했다. “창작이, 지은이가 대단한가? 잘 한 창작, 좋은 지은이가 대단한 거다. 번역도 마찬가지다. 많이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게 중요하다.”

번역서 수요가 많다 보니, 너도나도 번역을 한다. 번역의 질이 들쑥날쑥이다. ‘전문 번역가’의 심정은 어떨까. “모든 번역문 완성도가 높을 필요는 없다. 어떤 목적의 텍스트냐에 따라 다르다. 급한 대로 오역만 없으면 되는 텍스트도 있다. 거기서 인간만 할 수 있는 번역과 기계에 맡겨도 되는 번역이 갈린다.”

인간만 할 수 있는 번역에 대한 정 교수의 정리는 이렇다. “번역의 핵심은 ‘읽어 내는 것’이다. ‘말’은 성글다. 해상도가 낮다. 상상으로든 학습으로든 빈 부분을 채워서 맥락을 구축하는 읽기를 기계는 아직 하지 못한다. 좋은 번역자는 텍스트를 깊이, 박박 긁어서 읽고 풍부한 걸 찾아낸다. 언어는 어떤 실체의 ‘빙산의 일각’이다. 맥락을 잘 구축하면 빙산을 거느린 번역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일각이 된다. 번역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정영목 번역가가 옮긴 소설들. 문학동네 제공
정영목 번역가가 옮긴 소설들. 문학동네 제공

‘번역 투’는 여전히 게으른 것 혹은 실력 없는 것으로 푸대접받는다. 정 교수는 번역 투를 걷어 낸 매끄러운 번역에 반대한다. ‘투명한 번역가’가 되는 걸 거부한다. “외국어를 번역한 한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제3의 회색 언어다. 그걸 인정해야 한국어가 넓어진다. 술술 잘 읽히는 것만 따지는 건, 소화 잘 되는 이유식만 먹고 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의 새로운 시도에는 박수를 치면서, 왜 그걸 부지런히 살려서 번역한 글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나. 물론 미숙해서 자연스럽지 않은 번역과 부자연스러움을 의도한 번역은 다르다.”

데버러 스미스 번역가가 영어로 옮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한국에서 ‘나쁜 번역’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번역자가 단지 잘못 읽은 것이라면, 번역이 소설 이해에 방해가 된다면, 영어 번역작의 완결성에 문제가 있다면, 논란이 성립할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아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영어로 번역한 ‘채식주의자’는 한국 문학인가? 영어로 기록된 순간 이미 영어 문학에서 자리를 잡은 작품이다. 한국 문학의 하위 범주 차원에서 논의되는 건 왜인지 고민해 보면 좋겠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피동형 문장을 비롯한 영어식 표현은 글쓰기의 금기다. 번역가에게 죄를 묻곤 한다. 외국어를 닮은 문장은 유죄인가. “기계적으로 가를 순 없다. 피동형으로 써야만 하는 문장이 있다. 문장의 무게와 온도에 따라 판단한다. ‘비가 오늘 아침에 내가 학교 가는 걸 막았다.’ 직역 투의 문장이다. 그렇게 쓰지 말라고 한다. ‘비 때문에 못 갔다’고 바꾸는 게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독특한 느낌을 살려야 할 때가 있다. 번역가는 스스로 납득되는 말로 번역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신상순 선임기자

정 교수는 한국에서만 영어를 배운, 세칭 ‘토종’이다. 그러고도 번역을 잘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네이티브 스피커가 자기 언어를 더 잘 읽을 가능성이 크긴 하다. 하지만 언어는 어떤 선을 넘어서면 단지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가 달라도 인간은 비슷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영어 원서 독서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거다. 대신 나는 한국어 책을 그만큼 많이 읽었다.”

정 교수는 서울대와 같은 대학원 영문학과를 나와 1991년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번역가가 그럴 듯한 직업인으로 인정받기 전이었다. ‘삶’을 포기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일 같아서였다. ‘미스터리 걸작선’(도솔)을 시작으로 28년간 영어로 쓴 ‘많은’ 책을 번역했다. “숫자를 보람으로, 트로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번역한 책을 세지 않는다고 했다(인터넷 서점에서 ‘정영목’으로 검색되는 책은 약 300권이다). 그는 역자 후기에 ‘엉성한 번역’ ‘부실한 번역’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미 ‘대가’가 된 이의 의도한 겸손일까. “번역하면서 사라진 것들이 아쉬워서다. 내 언어가 얼마나 빈약한가를 매번 깨닫는다. 언어는 요물이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이우진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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