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ㆍ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 60주년 정상회의에서 “앞선 대전(大戰)에 깊은 반성을 한다”고만 말했다. 역대 총리들이 반둥회의 등에서 밝혀 온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빠진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날 반둥회의 10원칙 가운데 ‘침략, 무력행사에 의해 타국의 영토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다’‘국제분쟁은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한다’는 두 가지를 강조한 뒤 “일본은 이 원칙을 앞선 대전(2차대전)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어떤 때라도 지켜나가는 국가일 것을 맹세했다”고만 언급하고 넘어갔다.
반성의 대상을 일본이 미국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뛰어든 2차대전으로 한정함에 따라 그 이전 한국을 비롯 중국 등 주변국에 대한 침략은 사죄는커녕 반성의 대상에서도 제외시킨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는 2005년 반둥회의 50주년 회의에서 “과거 일본은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국가에 다대한 피해와 고통을 줬다”고 사과한 뒤, 4개월 뒤 ‘고이즈미 담화’에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은 바 있다. 이는 일본 총리의 역사인식이 10년 만에 어떻게 퇴행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따라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은 물론 ‘아베 담화’까지 과거사 언급은 요식행위로 건너뛸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날 아베 총리의 행보는 역사문제는 어물쩍 넘어가며, 이에 대한 국제사회 비판 역시 정면 돌파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아베 스스로 “자신이 사과하면 뒤따를 총리도 영원히 사죄를 계속하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결국 아베 총리의 역사도발은 미국만이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베 정권 핵심부는 미국 조야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견제할 동북아 첨병역할에 충실한 이상 ‘줄타기 외교도발’에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아베 정권은 또 한국과 중국의 분리대응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아베는 이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중일정상회담을 가졌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아베 총리는 2차대전 이전의 식민지 침략에 대해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며 “시진핑 지도부가 부패와의 전쟁 등 당내투쟁을 끝내 권력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과거사 문제에 한국과 달리 유연하게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과거 식민지배 및 침략에 대한 사죄를 포함하지 않을 방침임을 시사한 것에 대해 “우리 과거사 문제에 접근할 때 주변국들을 배려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고 밝혔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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