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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답정너’에 들러리 서는 전문가들

입력
2016.05.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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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을 부실투성이로 만든 것은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정부, 무능하고 부도덕했던 경영진 등 여럿의 합작품이지만, 회계감사법인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대우조선의 외부감사인이었던 안진회계법인은 2013,2014년 대우조선이 각각 4,000억원대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작성한 재무제표에 대해 ‘적정’ 의견을 제시했었다. 해양플랜트 부문의 대규모 손실 때문에 2014년 현대중공업은 2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고, 삼성중공업도 영업이익이 급감했는데, 대우조선만 유독 실적이 좋았으니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회계법인의 전문가들은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지난해 대우조선의 경영진이 바뀌고 회사측이 대규모 손실이 있었음을 고백한 뒤 분식회계 논란이 일었고, 금융당국이 조사에 들어가자 회계 전문가들은 부랴부랴 ‘오류가 있었다’며 2조4,000억원의 손실을 2013,2014년 대우조선 실적에 뒤늦게 반영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2조원이 넘는 오류가 발생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혹시 회계 전문가들이 대우조선과 ‘짬짜미’가 돼 고의적으로 부실을 덮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업계의 이야기다. 한 회계사는 “한 기업의 회계감사에 투입되는 인원이 수 십 명에 달하는 데 이들이 모두 기업과 한통속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진 않다”며 “잘못을 알고서도 봐주는 정서는 사라졌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의심 가는 대목이 있어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대충 넘어간 부실 회계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정황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안진회계법인은 2014년 대우조선을 감사할 때 총인원 30명을 투입해 6,215시간을 들여다봤다. 회계사 등 전문인력은 15명이 동원됐고, 현장 감사일수는 25일이었다. 2012,2013년에도 비슷했다. 그런데 2015년엔 총 46명(전문인력 23명)이 투입돼 예년의 2배인 1만2,715시간 동안 감사를 벌였고, 현장감사일수도 115일로 급증했다. 평소엔 설렁설렁 감사를 하다가 문제가 되자 인력과 시간을 늘렸다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그리고 나서 잘못을 인정하고 정정공시를 했다.

왜 이런 구조가 됐을까.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기업 감사는 업무량이 많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져야 할 일이 많고, 컨설팅만큼 돈이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회계사들이 꺼리는 업무”라고 말했다. 회계법인 입장에선 고객사인 기업의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들기 어려운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때론 돈 때문에, 때론 관행이라는 이유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에 무기력한 전문가들. 요즘 널렸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관련해 옥시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한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대 조모 교수는 심각한 ‘답정너’ 케이스다. 서울대 교수에 독성학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라는 막강한 전문성은 악덕 기업의 들러리로 전락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가 무너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희소성에 따른 권위 때문에 여전히 높은 기대와 신뢰를 받는 부류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쪽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 제 역할을 해줄 거라고, 그래야 나라도 경제도 사회도 잘 돌아갈 거라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똑똑한 그들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게 보통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배신당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전문가 집단은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해결사를 자처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강화해왔다는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문가를 찾는 시민들은 ‘고객’으로 국가는 전문가들의 ‘기업’으로 전락했고, 인간들은 갈수록 무능력해진다는 비판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전문가들의 방조 혹은 동조로 발생한 우리 사회ㆍ기업의 피해가 너무 크다. ‘답정너’에 굴복하는 전문가들의 행위는 범죄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한준규 산업부 차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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