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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저울] 할아버지에 성추행 당한 손녀의 속마음은 누가 알아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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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저울] 할아버지에 성추행 당한 손녀의 속마음은 누가 알아줬나

입력
2016.08.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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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친할아버지에게 수년간 성추행을 당한 여중생 A양은 방과 후 공부를 하러 간 경기 의정부의 산속 절에서 엄마뻘 되는 법원 직원과 마주했습니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된 70대 후반 할아버지의 2심 선고를 앞둔 때였습니다. “애들이 (제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걸 보는 게 싫어요”라며 피하던 A양에게 법원 직원은 “아줌마가 ○○이 잘 있나 보고 싶어서 왔어. 판사님이 ○○이의 얘기를 꼭 듣고 싶대”라고 설득했습니다. 차 안에서 처음에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 아니야. 할아버지한테 죄송해요”라고 했던 A양에게 아줌마는 “○○이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알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 A양은 법원에서 왔다는 아줌마의 손을 잡은 채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제가 어른이 되어 제 힘으로 방 한 칸 구할 때까지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엄마처럼 A양을 달래준 그 아줌마는 이후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소녀의 얘기를 보고서로 써서 2심 재판부에 전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고령이고 반성한다는 이유 등으로 올 1월 2심에서 징역 2년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중형이 유지돼 A양의 바람을 외면하진 않은 선고가 났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 절에서 A양이 오기를 꼬박 2시간을 기다린 아줌마는 법원 양형조사관이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서울중앙지법

인분 교수 사건, 세 모녀 살인사건에도…

법원 양형조사관은 형사사건 담당 판사가 범죄사실을 파악하고 양형을 고민하는 시기, 그러니까 선고를 앞두고 피해자나 그 가족의 피해 상황이나 심리 상태가 어떠한지, 피해회복(합의)은 얼마나 됐는지, 가해자의 처벌을 희망하는지 등을 고려할 때 법관 대신 현장을 뛰며 조사하는 법원 직원입니다. 피고인에 대해서도 성장배경은 어땠는지, 합의 과정은 단지 엄벌을 피할 목적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등을 두루 살펴보는 것도 양형조사관들의 업무입니다.

최근 들어 법원 양형조사관이 형사 재판부의 요구에 따라 현장에 투입돼 사건 당사자들의 속 깊은 얘기를 끌어내고, 그를 담은 결과보고서가 양형에 참고자료로 쓰이는 형사사건 사례들이 부쩍 쉽게 눈에 띕니다.

교수의 잔혹한 제자 학대로 국민적 공분을 샀던 ‘인분 교수 사건’도 양형조사관들이 나선 대표적 사례입니다. 지난 5월 27일 서울고법 법정에서 2심 재판장은 주범인 장모(53) 전 교수에게 “범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지적하면서도 “다만, 가장 큰 고통을 겪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을 반영하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형량을 4년 줄인 징역 8년을 선고했습니다. 감형의 근거로 재판장은 두 달 전 양형조사관들이 피해자 B씨를 직접 만나 장 교수를 용서하게 된 과정에 강요나 협박이 없었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습니다. B씨는 양형조사관에게 “한때 같은 피해자였던 (가해자) 김○○의 반성과 그 가족의 진지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고, 그에 대한 연민과 용서의 감정에서 장씨 등과도 합의를 하게 됐다”고 털어놨습니다.

이 외에 주식투자에 실패한 명문대 출신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서초동 세 모녀 살인사건’을 비롯해 ‘관악구 어린이집 뇌사 사망사건’ ‘여자친구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에는 양형조사관들의 보고서가 판사 앞에 놓였습니다. 특히, 세 모녀 살인사건의 1심은 양형조사보고서를 언급하며 사위의 범행으로 딸과 손녀들을 잃은 유족의 복잡한 심경을 전했습니다. 재판장은 “피해자 가족들이 피고인의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는 냈지만, 확정적인 의사라기보단 가족들의 복잡한 심경과 여러 복합적인 의사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2월 병원 조형물에 불을 지른 50대 조현병 환자 사건에서 법관이 정신질환의 정도 등을 양형조사관에게 파악하도록 한 것을 감안하면 최근 여성 혐오범죄 논란을 일으킨 ‘강남역 20대 여성 살인’사건에서도 양형조사관이 투입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함께 살던 남성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토막 내 대부도 방조제 근처에 유기한 조성호 사건을 맡은 수원지법 안산지원 재판부도 “범행 동기를 더욱 면밀히 살펴보겠다”며 최근 양형조사를 결정했습니다.

대법원이 제공한 통계를 보면 양형조사관제가 처음 도입된 2009년 260건이던 접수 건수가 지난해 3,046건으로 대폭 늘었습니다. 양형조사를 요구해 본 형사재판부 현직 판사(사법연수원 31기)는 “유무죄 판결도 중요하지만 엄벌할 건 강하게 하고 사정을 참작할 건 반영하는 양형 판단을 잘해야 사법 정의가 선다는 판사들의 인식이 커지면서 점차 양형조사관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고, 실제로 그들의 조사 자료는 신뢰할 만한 양형 판단 근거로 쓰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 본심 헤아려야 사건 매듭

친할아버지의 ‘못된 손’에 수년간 고통을 겪은 A양을 만났던 서울중앙지법 소속 C 양형조사관은 5일 “기록에는 친권자인 아버지의 의견만 있지 피해자의 의사는 없었다. A양 아버지에게는 피고인인 자기 아버지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심리가 있었다. 가족의 도움을 못 받는 여중생을 만나야 할 사정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C 조사관은 A양의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A양의 성추행 피해를 신고한 학교 상담교사는 “일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학교의 경고 탓에 A양을 연결해주지 않아서 최초로 상담을 했던 해바라기센터 전문가를 겨우 찾아내 함께 A양을 찾아갔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소녀의 속마음이 법관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범죄피해자 측이 낸 합의서 등이 진짜 본인의 의사인지 의심이 들면 용서(합의)에 이른 과정의 내막을 고려할 필요가 있어서 양형조사관들의 발품이 필요하다고 판사들은 설명하곤 합니다. 지난달 21일 대구지법 상주지원은 지적장애 2급인 17세 D양을 성추행하고 간음한 동네 부동산 아저씨이던 최모(52)씨에게 징역 5년의 실형으로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D양 측이 형량을 깎는 데 가장 중요한 합의서(처벌불원)를 몹쓸 아저씨에게 써줬지만 재판장은 양형조사관의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재판장은 “피해자가 용서하고 싶지 않았는데 피해자 아버지의 요구로 합의서에 지장을 찍었다고 진술했고, 합의금도 400만원에 불과했다”며 “처벌불원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사기관과 법정선 응어리 다 못 풀어”

서울중앙지법 소속 이정식 양형조사관은 지난 5월 음주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은 한 여성의 딸에게서 “고맙다”고 한마디 들었을 때가 근래 가장 보람을 느낀 때라고 말합니다. 이 조사관은 “골절과 과다출혈 등 피해자의 상태가 심각한데 가해자 쪽에서 진심 어린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합의금을 주기로 했다가 이행하지 않으니 피해 가족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컸다”며 “피해자의 딸이 병간호를 위해 직장도 관두고 겪은 고통을 긴 시간 들어준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는지 고마워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법원의 윤병관 양형조사관은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 이들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때까지 충분히 들어주는 게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이라고도 얘기했습니다. 한 피고인 가족은 “선고가 어찌 나든 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고 전해졌습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 소속 양형조사관 5명을 비롯해 전국에 22명이 양형에 참작할 사안들을 조사하고 때때로 사건 당사자들에게 재판진행 절차 등도 안내하고 있습니다. 법무부 등은 양형조사관제가 유무죄에 대한 법원의 사전판단일 수 있고, 양형조사가 과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를 들며 반대 뜻을 강하게 밝혀왔지만, 법원의 적정한 양형 판단을 위해 필요한 면은 분명 있어 보입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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