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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아일랜드 대기근의 날(5.17)

입력
2018.05.1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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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부둣가에 선 대기근 추모 청동조형물. 이민선을 타러 가던 이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더블린 부둣가에 선 대기근 추모 청동조형물. 이민선을 타러 가던 이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감자는 대충 3월 초ㆍ중순 씨감자를 심고, 장마와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인 6월 말 수확한다. 5월은 씨감자에서 돋은 싹이 꽃을 피우고 왕성하게 신록을 뿜으며 뿌리로 양분을 보내는 계절이다. 1845년 ‘대기근(Great Famine)’의 첫 봄, 아일랜드 농민들은 남미-북미를 거쳐 건너온 감자잎마름병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밭을 응시하며 이전의 가뭄이나 냉해 흉작과는 다른 차원의, 세기적 재난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밀과 옥수수는 거의 전량 종주국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실어 간 탓에 감자는 아일랜드인의 주식이자 삶이었다. 물론 토지는 대부분 영국인과 극소수 지주 소유였고, 인구의 약 70%가 감자로 연명하던 영세 자작농과 소작인이었다.

서남부 해안지방에서 시작된 감자병은 점차 중부 동부로 확산됐다. 병든 씨감자로 농사를 시작한 46년의 흉작은 전해보다 심했고, 오늘날 ‘Black 47’이라 불리는 47년 작황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52년까지 지속된 아일랜드 대기근의 7년 동안 약 100만 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숨졌고, 또 100만 명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말이 이민이지 난민이었다. 그들이 탄 배는 ‘관선(coffin boat)’이라 불렸다. 승선자의 20~30%가 항해 도중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숨졌기 때문이었다. 1844년 840만 명이던 아일랜드 인구는 660만 명으로 줄었다.

기근의 끝이 수난의 끝도 아니었다. 영세농은 줄줄이 파산했고, 출산율도 급감했으며, 농지는 영국의 소와 양을 먹이기 위한 수출용 목초지로 변해갔다. 재난의 경제ㆍ사회적 원인이었던 종주국 영국은 저 재난과 재난 이후 아일랜드인 구호에 냉담했다. 해외이민 행렬은 그 뒤로도 이어져, 아일랜드 독립전쟁(1919~1921)과 아일랜드 자유국 독립 시점의 인구는 400만 명 남짓에 불과했다.

대기근 150주년이던 1994년 아일랜드 정부는 2000년까지 대규모 기념ㆍ학술행사를 추진하기 위한 대기근 희생자 추모위원회를 설립했고, 2008년부터 5월 17일을 대기근 추모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오늘 아일랜드인들과 해외 이주민들은 지역별 학술ㆍ문화 행사와 추모의 묵념 같은 이벤트를 연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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