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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포퓰리즘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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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포퓰리즘은 죄가 없다

입력
2011.06.2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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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안을 보수우파, 진보좌파 간 이념대립으로 치환해버리는 고질이 포장만 바뀌었다. 이른바 포퓰리즘 논쟁이다. 대중추수(追隨)주의쯤으로 번역되는 포퓰리즘은 알다시피 당장의 표와 지지를 위해 대중의 입맛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일컫는다. 지난해 진보교육감들의 무상급식, 체벌금지 등을 놓고 빈번하게 쓰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반값등록금을 계기로 우리사회 모든 현안을 아우르는 최대 화두가 됐다.

용어의 쓰임새를 보자면 본질은 보ㆍ혁논쟁과 별반 다르지 않을진대 포퓰리즘 논쟁은 더 위험해 보인다. 수구, 좌빨 같은 접두사가 붙지 않는 한 가치중립적인 보수ㆍ진보에 비해 포퓰리즘은 용어 자체에 이미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무책임, 선동, 근시안적, 저급, 정치쇼…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논쟁은 접점 모색 과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악한 대상을 상정한 선악의 공방이 된다. 이래선 어떤 발전적 합의도 기대하기 어렵다.

고질병 재연한 포퓰리즘 논쟁

사실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부터 포퓰리즘에 기반한 이념이다. 포퓰리즘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학자들이 근대 포퓰리즘의 기원으로 꼽는 브나로드(v-narod)운동도 마찬가지다. 일제 때 우리 민족지도자들도 19세기 말 제정러시아 청년학생들의 농촌계몽활동인 이 운동에 크게 감화돼 비슷한 운동에 헌신했다.

포퓰리즘에 부정적 이미지가 고착된 것은 결정적으로 페론주의로 대표되는 남미식 포퓰리즘 때문이었다. 후안 페론과 그의 두 부인 에바와 이사벨이 노동자, 빈민을 위한답시고 대책 없이 돈을 뿌려댄 탓에 국가경제기반을 완전히 파탄 내버린 것이다. 이들이 끼친 최대 해악은 현대국가의 궁극 목표인 복지를 포퓰리즘의 위험한 본질처럼 인식시킨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브라질에서 초등학교도 못 마친 노동자 출신의 룰라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이 페론의 아르헨티나를 떠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토지개혁, 빈민 지원, 학습지원금,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 확대 등의 파격적인 정책들을 실현해 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브라질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면서 세계 8위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했다. 말하자면 포퓰리즘의 대성공이었다.

이 두 사례는 포퓰리즘에 원죄를 씌우는 것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차이는 복지 확대를 사회 재생산구조로 연결시키는 정교한 정책의 유무에 있었다. 페론의 대가 없는 무상제공과 달리 룰라의 개혁은 철저한 조건부였다.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대신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반드시 농업기술을 익히도록 했고, 학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출석률과 성적 등과 연계해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지원대상에서 배제하는 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1980년대 이후 30년 이상 세계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가 이제 그 명분과 동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성장과 무한경쟁, 성과주의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대신 공정한 분배와 배려, 과정주의 방향으로 역사의 거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가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생산적 복지논의로 전환해야

한 세기 전 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서도 역시 선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음이 재차 입증됐다. 사실 우리는 이런 세계경제의 순환조차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다. 성장 일변도로 정신 없이 치달려 오기만 했을 뿐이다. 숨을 고르며 정책의 균형을 잡는 일이 우리에게 특히 더 절실한 이유다.

경제규모에 비해 부끄러울 정도의 초라한 복지재정을 두고도 복지과잉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금껏 뒤켠에 돌려놓았던 복지를 과감히 정책의 전면으로 끌어내되, 이를 재생산 구조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보자면 생각 없이 아무에게나 다 주는 반값등록금 같은 방식이나, 복지를 낭비적 시혜로만 보는 태도나 모두 잘못됐다. 부질없는 포퓰리즘 논쟁을 이제 정교한 생산적 복지 논의로 바꾸자는 얘기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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