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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노계대담

입력
2018.05.18 10:3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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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전문적으로 낳는 닭은 산란계라고 부른다. 병아리가 태어나 5개월이 지나면 알을 낳기 시작한다. 그러면 양계장으로 옮겨 평생(약 12~15개월) 동안 산란을 유도한다. 매일 달걀을 낳을 수 없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효율을 위해 라인이 폐쇄된다. 도계장에서 처리되어 대부분 동남아로 수출된다. 노계는 질기고 맛이 없다는 인식에서다.

죽기를 기다리는 노계를 인터뷰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생년월일은 : 2016년 12월 16일생입니다. 경기도의 한 산란종계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관계는 : 엄마가 낳은 8개의 알이 함께 부화장으로 가서 남동생과 오빠는 부화된 뒤 바로 초등학교 앞 노점으로 팔려 나갔다고 들었어요. 다른 두 명의 여동생은 전라도의 산란계장으로 가고 저 혼자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름은 : 이름은 없고요. 족보는 뼈대 있는 집안이래요. 레그혼(Leghorn) 할아버지가 시조인 하이라인 브라운(Hy-Line Brown)파(派)입니다. 흔히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진한 살구색 계란이 우리 집안입니다.

-산란시기 : 처음 계란을 낳았던 때가 2017년 5월 10일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알을 낳다가 이후 매일 큰 알들을 낳았습니다. 어떨 때는 하루에 두 개씩 특란을 낳을 때도 있었지요. 그래서 총 350여개의 알을 낳았어요.

-짧은 부리 : 토종닭이나 육계는 부리가 길지만 산란계로 오는 닭들은 부리의 30~50%가 전기로 된 부리절단기에 대부분 잘립니다. 태어나서 8일 정도 지났을 땐데요. 그 고통과 공포는 지금도 몸서리가 납니다.

-부리절단 이유 : 닭은 모이를 쪼는 본능이 있는데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친구들을 쪼고 집단으로 학대해서 죽이는 행동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습성을 조류의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고 한대요. 유독 산란계가 다른 닭에 비해 심한 이유는 저희가 워낙 좁은 공간에 살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보시는 신문의 4분의 1 정도의 넓이에서 평생 산다고 하면 압박감의 무게는 어느 정도 일까요.

-눈의 충혈 : 제 눈이 빨갛게 보인다고요.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고요. 산란계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조명’과 ‘냉난방’입니다. 닭은 색을 인식하는 범위와 민감도가 사람과 전혀 달라요. 빛의 색에 따라 생산성이 달라집니다. 빛은 우리 머리 앞쪽 뇌를 자극해 난포자극 호르몬의 분비를 돕습니다. 빨간색 전구를 24시간 켜 주면 알을 가장 많이 낳을 수 있답니다.

-가장 힘든 일 : 작년 8월 살충제달걀 파동이 있을 때입니다. 저희는 다행히 검출이 없어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자매들이 살 처분을 받았습니다. 팔 수도 없는 계란을 낳는 닭을 키울 명분도 돈도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작년 1월 조류독감에 이어 살충제 닭 파동에, 이번 달에는 정부의 살충제 전수검사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집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 잘생긴 수탉과 멋진 밤을 보내고 유정란도 낳고 싶어요. 가슴에 품어 부화한 병아리와 함께 모이도 쪼고 한가로이 놀고 싶어요. 닭의 일생은 24개월이 아닙니다. 닭은 최소 300개월 즉, 10년도 더 사는 동물입니다. 물론 저희보다 못한 육계는 두 달도 못살고 죽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의 닭처럼 살고 싶어요. 선진국에 사는 닭들은 불쌍해요. 풀밭에서 먹이 찾고 사는 자연방사장 만들고 행복하게 닭의 본능대로 살다 가도록 인도해 주세요.

닭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많은 자매들이 털을 쪼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두렵지 않아요. 정말 두려운 것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공장식 사육과 면역력 저하 그리고 막대한 예산낭비 속에 사라져 가는 우리 자매들의 슬픈 목소리입니다.

유상오 한국귀농귀촌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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