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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종호의 판사의 길] 회복적 사법의 사회적 의미

입력
2018.01.11 15:1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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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범죄자에게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사회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응보’로 해결하는 사법적 정의만으로 피해자와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응보 외에 ‘회복’이 함께 해야 한다. 왜 그럴까?

사법에서의 정의는 사회적 가치가 적정하게 분배되지 못하거나, 적정하게 분배된 사회적 가치를 침탈당하거나 그 누림에 방해가 있을 경우에 이를 바로잡는 ‘시정적 정의’가 핵심을 이룬다. 나아가 사법에서의 시정적 정의는 ‘응보적 측면’과 ‘회복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응보적 측면이란 어떤 행위를 저지른 자에 대하여 그가 저지른 행위에 상응한 조치를 가하는 것을 의미하고, 회복적 측면이란 개개 사건에서 당사자가 원하는 상태로의 회복이나 보상이 이루어지게 하거나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응보와 회복은 범죄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범죄에 대한 대응으로서 회복적 측면을 강조하는 이론이 이른바 ‘회복적 사법론’이다. 이는 범죄를 국가 내지 개인에 대한 법익 침해행위 등으로 보는 ‘응보적 사법론’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침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회복적 사법론은 가해자에 대한 엄벌이라는 응보적 대응만으로는 범죄피해자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회복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에 가해자에 대한 엄벌만이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 배려라는 생각을 지양하고, 피해자의 정신심리적 상처의 치유와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를 출발점으로 하는 관계회복이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한 길임을 강조한다.

회복적 사법론에서는 회복적 사법을 ‘가능한 한 잘못을 바로잡고 치유하기 위하여, 특정한 가해행위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관여시켜, 피해와 니즈(needs), 그리고 의무를 함께 확인하고 다루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 형사사법에는 아직 회복적 사법의 이념이 제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소년법에서 회복적 사법의 이념을 반영하는 제도로는 ‘화해권고제도’를 들 수 있다. 이는 판사가 가해소년의 품행을 교정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가해소년에게 피해 변상 등 피해자와의 화해를 권고할 수 있고, 가해소년이 권고에 따라 피해자와 화해하였을 경우에는 소년보호처분을 결정할 때 이를 고려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화해권고제도를 이용한 피해자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 제도의 활용도는 그리 높지 않다. 특히, 학교폭력사건 등과 같은 관계적 범죄에는 회복적 사법이 작동되어야 할 필요성이 아주 높지만, 절차에 회부해도 피해자 측이 화해의 장에 서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가해자와 대면하는 것이 불편하고 때로는 두려울 뿐만 아니라, 일단 사건화된 이상 화해보다는 엄벌을 통한 응보를 바라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원까지 사건이 접수되어 오는 동안 화해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이 있었을 것인데 이를 놓쳐 피해자 측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것도 이 제도의 활용도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양각색의 범죄들을 보면 범죄 이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회복적 사법의 최종 목표는 그러한 관계들을 깨어지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데 있다. 하지만 범죄의 당사자, 특히 피해자 측이 관계의 회복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회복적 사법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사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회복을 바라지 않는 경우에는 사건은 피해변상 정도로 마무리 되고, 부부관계는 파국을 맞게 된다. 학교폭력사건의 경우에도 피해학생이 가해자와의 관계회복을 바라지 않는 경우에는 가해자로 하여금 반을 바꾸게 하거나 전학을 가게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퇴학하게 하는 조치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결국 회복적 사법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회복되어야 할 관계가 있어야 하고 당사자 모두가 그 회복을 바라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가정해체율이 매우 높고, 사회의 연대의식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다. 학교가 ‘관계 맺기 교육’보다는 ‘성적경쟁’을 우선시하다 보니 학생들 사이의 유대감도 매우 희박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나 범죄가 발생한 경우 어차피 회복될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 관계회복보다는 관계의 파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처벌에 무게를 두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가 고착되어 갈수록 사회의 통합이나 연대는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종국에는 사회전체의 행복지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것이다.

결국 회복적 사법의 활성화는 사회의 연대감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이는 약해져 가는 사회적 관계의 고리를 강화하는 것이 범죄피해자를 비롯한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길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강조하는 회복적 사법이 폭넓게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다.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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