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원 기자

등록 : 2017.01.11 20:00
수정 : 2017.01.12 00:31

日 공장지대 심상찮은 바람… “대기업 위한 TPP, 좌초가 잘된 일”

[도쿄 오타구 중소공업지구 르포]

등록 : 2017.01.11 20:00
수정 : 2017.01.12 00:31

도쿄 오타구 동네공장 르포

“트럼프가 세계 휘어잡을테니

일본에게도 좋은 일 없을 것”

“2008년 이후 계속 내리막길

TPP 발동해도 나아지지 않아”

中企 사장들 “좋은 시절 끝” 허탈

수출보다 내수 살리기 정책 요구

도쿄의 중소기업단지인 오타구 마치코바에서 중장비 회사를 운영하는 후쿠다 노보루(福田昇) 사장이 지난 연말 허탈한듯 "세계화가 더 발전하더라도 우리같은 작은 공장에는 좋은 시절이 안올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을 신호탄으로 ‘반세계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지만 이웃 일본은 예외 지역으로 꼽혀 왔다.

트럼프가 당선 일성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하는 등 자유무역을 위협하고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가 발빠르게 강한 우려를 표하며 이를 막는데 사활을 걸고 있어서다.

하지만 ‘반세계화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일본에서조차 반세계화 흐름에 동조하는 미세한 조짐이 곳곳에서 확인돼 다소 충격적이다. 미국과 함께 TPP 발족을 주도한 일본은 멕시코, 캐나다, 베트남,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등 12개국이 관세철폐 및 규제완화로 세계국내총생산(GDP) 40%를 담당하는 거대 경제권으로 이어질 목표를 내걸었다. 하지만 트럼프 등장 후 이는 사실상 물 건너갔고 일본 수출업계를 중심으로 깊은 실망과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반세계화의 파장이 미칠 영향은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일본 국민도 반세계화가 싫지 않다”

도쿄 남부 오타(大田)구 마치코바(町工場ㆍ동네공장)는 서울의 옛 구로공단처럼 수천 개의 중소기업이 모여 있는 곳이다. 골목골목 비좁게 들어선 집들과 낮은 건물이 겉보기엔 도심 외곽의 주택가와 비슷하지만 실제는 소규모 공장들이다. 모노쓰쿠리(장인정신) 가치로 무장돼 특화된 기술력과 노하우로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알찬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지난 12월 28일 JR가마타역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공장지대로 들어가자 연말 밀려든 일거리로 이곳은 한창 어수선했다.

이곳에서 30년째 기계가공 일을 하고 있는 아라타 쇼조(新田勝三ㆍ56)씨는 “세계가 글로벌리즘에서 내셔널리즘으로 옮겨 가고 있고 지금처럼 글로벌리즘으로 해외에 물건 팔아 의존하는 나라는 퇴화돼 갈 것”이라며 “영국인들의 ‘혼네(本心ㆍ본심)’가 결국 브렉시트로 향했듯이 일본인들도 곧 반세계화로 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아무리 자동차를 많이 만들어 수출해도 해외에 공장을 짓고 현지사람을 채용해 거기서 판매하니 대기업들만 돈을 벌뿐 일본 서민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오히려 TPP 좌초가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바로 옆 공장에서도 반세계화 트렌드가 차라리 나을 수 있다는 말이 이어졌다. 기계부품을 조립한다는 사장은 “TPP를 무역협정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는 우리 주권을 가져가려는 게 이를 준비한 지도자들의 노림수였다”라며 “이론으로 무장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같은 학자들이 무역을 이끌어 이득을 보는 국가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말도 있다”고 푸념했다. 그는 일본이 TPP와 같은 자유무역협정 없이도 잘 살아왔고 보호무역주의가 나쁘지 않으며 향후 일본 지도자들이 반세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이곳 마치코바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이참에 무역보다 내수 확대에 더 몰두해야 한다는 지적도 빠트리지 않았다.

철판가공업을 하는 마카미카 카츠노부 사장은 “3대째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TPP든 아베노믹스든 큰 기업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여서 아들에게는 가업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세계화나 아베노믹스나 대기업만 위한 것”

중장비를 취급하는 후쿠다 노보루(福田昇ㆍ44) 사장은 TPP가 이뤄지더라도 자신들에게 혜택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고 체념했다. 그는 “올해 경제상황이 너무 안 좋다. 일본은 경기가 좋은 곳과 나쁜 곳이 극단적으로 갈린다. 아베노믹스의 효과를 아무리 기다려봤자 우리 같은 중소업체에 볕이 들 일은 없다”라며 “일본 정부가 TPP를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원예상품을 만드는 가리오 쇼조(60) 사장도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경기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고 TPP가 발동해도 일본 경제가 특별히 나아질 것이라 보지 않는다”라며“트럼프가 세계를 휘어잡을 테니 일본은 좋을 일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 지역에선 대를 이어 가업을 고수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앞으로 가업이 끊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을 전망이다. 철판을 가공해 각종 안내표지를 만드는 마카미카 가츠노부(48) 사장은 “1958년부터 3대째 공장을 운영해 왔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불경기는 처음 본다”라며 “경기가 더 안좋아질 것 같아 아들에게는 이제 일을 물려 주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농업과 연결된 사업을 한다는 50대의 한 사장은 “TPP가 무산되면서 농업개방을 막은 게 다행”이라며 “세계적인 부자인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의 보호무역 정신을 배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30년간 자동차엔진 부품을 만들어 수출해온 아카사카 카즈오(赤坂一男) 사장은 “트럼프의 TPP 탈퇴는 무책임한 행위다"며 "미국같은 큰 나라가 보호무역으로 자기들만 잘살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물론 TPP 무산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게 확인됐다. 30년간 자동차엔진 부품을 만들고 수출해왔다는 아카사카 가즈오(赤坂一男ㆍ77)씨는 “트럼프의 TPP 탈퇴는 무책임한 행위다. 관세가 오르면 자동차 관련 수출실적이 악화돼 일본경제가 나빠진다”며 “보호무역으로 자기들만 잘살겠다니 일본은 이제 미국만 의존하지 말고 다른 국가들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상당수 마치코바 주민들은 일본 정부 및 대기업들과 달리 세계적으로 무역이 활발해지고 수출이 잘되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수순에 동의하지 않는다. 반세계화에 동조하는가하면 내수경제 살리기에 더 몰두해야 한다는 말들이 주된 주장이었다. TPP가 무산돼 값싼 해외제품과 경쟁을 피하게 됐다며 반기는 목소리, 지나친 세계화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어도 도쿄의 중소업체 밀집지역에선 힘을 받고 있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옛 서울 구로공단과 같이 수천개의 중소기업이 밀집되어 있는 일본 도쿄 오타구의 마치코바 골목. 허름해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실력있는 수출업체들이 수두룩하다. 도쿄=박석원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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