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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간은 쌓인다

입력
2017.08.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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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흐르는 강물처럼 역사가 흐른다. 시간이 쌓이는 곳도 있다. 숲이다. 세월의 부피만큼 나무는 성장한다. 나무의 값이란 지나버린 시간들을 돈으로 환산하여 되찾는 유일한 셈법에 다름 아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시간이 쌓이는 등고선(等高線)이다. 삶의 지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나이테의 숫자가 그러하거니와 그 폭의 넓고 좁음에서 시간들의 평화와 고통까지도 극명하게 증언한다. 우리들의 얼굴에도 시간이 쌓이는 궤적이 그려진다. 시간의 숫자와 그 깊이까지 주름살로 표식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훈장이거나 삶의 멍에의 흔적이어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얼굴은 각자의 몫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도 나무처럼 늙고 싶다.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알몸으로 이겨낸 뒤에 얻어진 초월과 해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면 나무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가 심상치 않다는 지금 나무가 여름을 통과하는 의식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입추(立秋)가 지났지만 무더위는 여전하다. ‘입춘 추위’가 한겨울 추위보다 더 맹렬하듯 ‘입추 더위’도 그러하다. 이제 입추이니 조금만 더위를 견뎌내면 가을이다라는 자기암시는 무더위의 절정에 입추라는 절기를 그려놓은 선조들의 지혜일 수 있다. 이즈음은 나무들에게는 금년 마지막 성장의 용틀임을 해야 하는 야생의 시간들이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가는 봄 가뭄의 타는 목마름도 겪었기 때문이다. 구름 한 점 없이 공활한 가을 하늘을 흉내낸 하늘에서 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힌다. 바람 한 점 없다. 나무들이 헉헉 토해내는 산소들에도 숨이 막힌다. 풀을 뽑는다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한다. 생활의 여유를 찾으라고 하지만 우선은 일사병을 건너뛸 수 있을 만큼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문명의 에어컨 바람에 약해진 면역체계를 탓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지금이 나무들에게는 최적의 성장환경이다. 나무들이 지금 무더위 속에서 이렇듯 미친 듯(狂) 성장열차를 타지 않고서는 한겨울을 나목(裸木)으로 견딜 내공을 쌓을 수 없다. 그렇게 나무가 성장하는 거친 기관차의 숨소리가 교직(交織)하는데 사나운 여름은 오히려 무섭게 적막하다. 먹이를 탐하는 산새들의 노래에 한눈 팔 새가 없다. 공기 중의 질소를 자연비료로 만들어 준다는 몇 번의 천둥벼락이 채찍질할 뿐이다.

시간이 쌓이려면 우선 멈춰야 한다. 지금은 사람이 자연의 운행에 끼어들 틈이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연에 맡기고 지켜 볼 뿐이다. 항상 지나친 것이 못 미침보다 못하다(過猶不及)는 것은 백 년을 못 사는 사람들의 한가한 예의(禮儀)일 뿐이다. 나무들은 사람의 기준으로는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치는 성장통(成長痛)을 앓으면서 경외감을 갖는 큰 숲을 만들고 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는 실천을 몇 백 년을 되풀이하는 생태계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매듭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려는 한가한 생각은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들의 안타까움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나무와 함께 살면서 삶에서 무슨 일이든 사계절의 비바람과 폭염과 혹한이 열 번은 넘어야 비로소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배운다. 시간이 쌓여가는 숲 속에서 역사의 위대한 어떤 장면은 사회관행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려는 아마추어의 유쾌한 배반이 성공한 힘겨운 몸부림의 그림이었음을 되새긴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서 수목원의 위대한 여름이 가고 있다. 아침 저녁의 삽상한 바람이 이를 말한다. 엊그제는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는 처서(處暑)이다. 비가 내리는 처서에 벼 이삭이 제대로 팰까를 걱정하는 농부의 시름도 들리는 듯하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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