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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정상적인 나라에서 산다는 것

입력
2017.05.2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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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지만, 내게도 1980년대는 숨막히는 두려움과 냉소의 세월로 기억에 남아있다. 생애 처음으로 기억하는 대통령이 앞머리가 벗겨진 채 험상궂은 얼굴로 TV에 나오던 전두환이었다. 그 시절 누군가 시국에 대해 진지한 어조로 분통을 터뜨리면, 그 주변에는 곧바로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다른 아저씨들이 있곤 했다. 다 큰 어른들이 비실비실 웃으면서 “에~에~에”(조용히 하라는 뜻의 야유) 하는 소리를 내고, 눈알을 굴리거나 혀를 내밀기도 했다. 그런 조건반사적이고 유아적인 반응은 90년대에도 이어졌는데, 자기들끼리 “왜 너 혼자서 열내?”, “혼자 튀지 마”, “너 잘났다”는 말을 내뱉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그 모든 언행이 자신의 굴종을 정당화하는 방어기제이자 사회에 만연한 냉소임을 알았다.

성장과정에서 때론 작은 사건이 인생의 태도를 결정짓는 심원한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 경우 한국에서 체험한 중3 때의 사건이 그랬다. 학급에 요즘 말로 하면 ‘일진’들이 유독 많았는데, 그들은 폭력만 휘두른 것이 아니라 나름의 문화적 질서를 만들었다. 쉬는 시간에 교실 맨 뒤편에서 그들이 약한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새디즘을 발산하며 폭력을 휘두를 때, 다른 아이들은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만 있는 게 아니라, 다같이 맞는 아이를 욕했다. 당해도 싼 이유가 있다면서. 멀쩡한 내 친구가 맞지 않았다면, 그때 그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싸움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절치부심한 끝에 싸워서 그들을 누르지 않았다면, 나는 그 후로 어떤 어른이 되어 갔을까.

정치제도가 민주화 된 이후에도, 학교와 군대, 직장에서 일상의 폭압은 그대로 이어졌다. 폭압을 행사하는 이들은 가만히만 있던 게 아니라, 자신이 폭력의 일부일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10대 때 어울리던 아이들 가운데는 “우리 아버지는 왕보수야!”라고 뻐기는 부류들이 있었는데, 그때 ‘보수’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유서 깊은 보수주의 철학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런 말이 전달하는 함의는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강자의 편이고, 그래서 나도 강자다. 독재고 권위주의고 나발이고, 강한 쪽에 붙는 자들이 잘 산다. 나는 우리 가족이 잘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고, 뻐길 만하다. 사회에서 그걸 ‘보수’라고 부른다면, 나는 당당히 그렇게 불리겠다”

폭력이 지배해 온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비정상적인 것들이 마치 정상적인 양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해 왔을지 생각해 본다. “가만히 있으라”는 정언명령 속에, 가만히 있기 위해 사회의 약자들에게 언어폭력을 일삼던 상당수 국민들의 모습을 목도하며, 제대로 된 어른 됨의 버거움을 곱씹는다.

저 너머에서 들쥐와 하이에나 떼의 웅얼거림이 들려온다. “그래…당분간 까불어라. 어차피 이 사회에 지난 수십 년 간 축적되어 온 힘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철모르고 까불다 조만간 한꺼번에 쓸려 나갈 때, 기울어진 운동장의 꼭대기에서 웃고 있는 건 우리들일 것이다”. 보다 나은 인간상에 대한 공감과 동의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나는 지난 경험을 반영하는 그들의 예측이 대체로 맞을 것이라고 본다.

문화사 연구자인 린 헌트(Lynn Hunt)는 프랑스 혁명을 폭군 아버지를 몰아내기 위해 형제들이 연대해 온 장기지속적인 사회심리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간 한국에는 좋은 아버지가 부재했고, ‘거세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그 자식들도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우린 새로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아버지와, 정상적인 나라의 상을 새로이 만들어 가기 위한 정신 혁명이 필요하다.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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