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가족화ㆍ개인주의… 집보다 병원 선호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을 때 집에 돌아가고 싶다.” 최근 서울 소재 대형병원에서 말기 암 치료를 받은 K(83)씨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보다 제주도 출신 환자들은 의료기관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을 꺼려한다. 양나미 제주대병원 홍보팀장은 “젊은 사람들은 몰라도 70대 이상 고령인은 의료기관에서 임종하면 객사(客死)한 것으로 여긴다”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집에서 죽어야 저승에서도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K씨처럼 임종을 목전에 둔 환자들은 삶과 추억이 남아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삶을 마감하려 한다. 인지상정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난해 8월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원하는 임종장소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7.2%는 가정에서 임종하길 원했다. 호스피스기관은 19.5%, 병원은 16.3% 순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삶을 정리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집에서 죽을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핵가족화… “환자 모시기 힘들어 병원 선택”
가정이 아닌 의료기관에서 임종하는 이들이 증가한 것은 핵가족화 영향이 크다. 부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이현숙 수녀는 “과거에는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임종을 맡는 것이 당연했지만 핵가족화 되면서 유대감과 친밀감이 사라져 장기간 집에서 병든 부모를 모시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만난 A(45)씨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 달 넘게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병원에서 나가라고 하면 답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버지를 집에서 모시고 싶어도 맞벌이 부부라서 어렵고, 큰 아이가 수험생이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는 “사실상 치료가 무의미한 것을 알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연명치료를 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전체 사망자 26만8,088명 중 의료기관에서 숨진 사람은 19만1,682명(71.5%)에 달했다. 암환자의 의료기관 사망률은 더 높다. 암으로 사망한 7만5,849명 중 6만7,581명(89.1%)이 의료기관에서 사망했다.
핵가족화와 함께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임종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의료인들은 “과거에는 부모가 사망하면 충격으로 괴로워하거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망자에 대한 애틋함이 덜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수녀는 “과거에는 평소 재산문제 등으로 가족끼리 갈등을 빚어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를 했지만 최근에는 환자가 죽기 전까지 가정불화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복잡한 행정절차 때문이다. 의료기관에서 숨지면 의료진이 사망진단을 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면 되지만 집에서 환자가 숨질 경우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망원인이 밝혀져야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가정 사망을 꺼릴 수밖에 없다.
급속한 고령화… 비암성 말기환자 ‘완화의료’ 필요
의료기관에서 사망하는 이들의 최후는 비참하다. 최근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가 시행되면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임종을 맞는 환자들이 늘고 있지만 대부분의 말기 환자들은 진통제ㆍ영양제 등을 공급하는 줄을 달고 차가운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생을 마감한다.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죽음의 질’이 밑바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윤종률 한림대동탄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환자는 물론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도 정신ㆍ경제적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라면서 “죽기 직전까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각종 약물을 투여 받다 의미 없이 죽을 것인지, 편안히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고심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의학적 고문이라 할 수 있는 연명치료에 대한 반성과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의들은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비(非)암성 말기환자의 임종관리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비암성 말기질환은 말기 암환자보다 임종예측이 어렵고,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 치료가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당뇨병 ▦만성간경화 ▦치매 ▦신부전증 ▦심혈관질환 ▦다발성경화증 ▦파킨슨병 ▦류마티스관절염 ▦약제내성 결핵 등을 비암성 말기질환으로 분류해 이들 환자의 죽음의 질을 높일 것을 권고하고 있다. 비암성 말기환자들은 연명치료보다 완화의료가 바람직하다. 완화의료는 말기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치료로 통증이나 신체ㆍ심리사회ㆍ영적 문제를 조기에 발견, 평가와 치료를 통해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시킨다. 송정윤 강동경희대병원 외과 교수는 “죽어서 캐딜락을 탈 것이 아니라 말기 환자들이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 임종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사망환자수ㆍ사망장소]
자료: 국민건강보험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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