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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선거가 곧 민주주의일 수야

입력
2017.05.1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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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을 규탄하기 위해 처음 열린 촛불집회의 결말은 박근혜 탄핵(2017년 3월 10일)에 이은 구속(3월 31일)으로 막을 내렸다. 국정농단으로 망가진 민주주의를 구하는 ‘기계장치의 신’은 선거였고, 5월9일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이 드라마를 요약하면 ‘촛불집회→탄핵→구속→선거’이니, 한 마디로 ‘기승전-선거’다.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여의도의 야당 정치인들이 한 역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라는 깔때기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시민의 염원을 일시에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범접할 수 없는 관성 때문이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가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갈라파고스, 2016)에 쓴 것처럼, “ ‘선거’와 ‘민주주의’라는 말은 동의어”이며, 이런 믿음 아래 우리는 모두 ‘선거 근본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선거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선거에서 뽑힌 선량들을 경멸하면서도 선거 자체만큼은 숭배하게 되었다. 선거 근본주의자들은 선거를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지 않고 선거자체를 목표이자 절대 분리할 수 없는 신성한 원리로 여긴다.

선거 근본주의자들은 ‘투표는 차선과 차악을 고르는 것’이라는 속삭임으로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를 회의하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한편, ‘참정권을 포기한 사람들은 정권이나 정치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는 말로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를 회의 하는 사람들을 겁박한다. 선거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인 것은 맞지만, 선거는 독재자나 무능력자가 당선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히틀러와 트럼프가 그런 보기였고, 박근혜도 이 사례에 넣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상을 실감하기 위해, 작년의 미국 대선을 복기해 보자. 민주당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이 지명되었을 때, 잭 부시가 민주당 후보로 나왔다고 가정하자. 알다시피 힐러리의 남편은 제42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었던 반면, 잭 부시는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동생이자 제 41대 대통령 조지 H.W. 부시의 아들이다. 대통령직을 가족들끼리 농구공 돌리듯 하는 것은 동남아시아ㆍ라틴 아메리카ㆍ아프리카ㆍ아랍ㆍ동유럽ㆍ중앙아시아의 독재 국가에서나 보는 것이다. 정치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던 이런 세습 아닌 세습이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민주주의가 모범적으로 운영되었던 서구에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런 가족 비즈니스에 “민주주의 왕가”라는 명칭을 선사했다.

언제부터인가 선거는 알랭 바디우ㆍ자크 랑시에르ㆍ가라타니 고진ㆍ슬라보예 지젝 등 내로라하는 정치 사상가들이 심심풀이로 씹는 주전부리가 되었다. 이들이 하나같이 좌파 일색인 것에서 좌파 모험주의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선거를 좋아하지 않기로는 우파도 마찬가지다. 선거(정확하게는 의회)는 예외의 순간에 필요한 결단을 지연시킬 뿐이라는 카를 슈미트의 논리는 이제 알려질 만큼 알려졌고, 한스헤르만 호페의 주장도 별로 낯설지 않다. 그는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나남출판, 2004)에서 왕은 자식에게 나라를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의 부를 소중히 여기는 반면, 선거로 당선된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은 “지금 소비하지 않는다면, 그 재화를 앞으로 결코 소비할 수 없을 것이기에 신속하게 국가의 자원을 고갈시킨다”고 말한다. 문재인 당선인만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회의하는 이들이 내놓는 대안이 추첨제 민주주의 밖에 없는 것은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해서다. 추첨제 민주주의는 지방 의회나 배심원 제도에는 유용하지만, 대통령 선거에는 쓸모가 없다. 한국보다 이틀 앞서 결선투표를 치른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페스트 아니면 콜레라다. 우린 둘 다 원하지 않는다”라며 투표장에서 무효표를 던진 유권자가 11.49%나 됐던 것처럼, 한국에도 그만한 수의 적극적 투표 거부자가 있다. 이들의 숫자가 더 커지기 전에 다양한 선거제도 개혁이 있어야 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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