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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표절(剽竊)에 관대한 사회

입력
2017.06.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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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기자 시절 필자의 별명이 ‘표절 킬러’였다. 당시 문화부에서 학술분야를 담당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의지로 갖고 이 문제에 달려들었다. 당시 주로 관심을 둔 분야가 법학 분야라 개인적으로 법학책을 훑으며 표절 사례 취재에 집중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의 교수들이 쓴 책을 하나씩 점검했다. 이 분야 전문가들 여러 명의 도움을 받았다.

첫 번째 사례. 일본 대학의 교양 교재를 거의 번역하다시피 하고 자신의 논문 하나를 형식적으로 덧붙인 채 버젓이 000저(著)라고 한 책이 확인됐다. 사실 확인을 위해 본인과 통화를 했다. 그 전부터 조금 알던 교수여서 통화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그 교수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 기자,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할 말이 없었다.

두 번째 사례. 같은 학교 헌법학의 대가라는 교수의 책 상당 부분이 명백한 표절로 확인돼 기사화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얼마 후에 다른 학교의 법대 교수가 회사로 찾아왔다. 근처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눴다. “왜 저를 보자고 하셨죠?” “저 실은 그 책은 제 선생님이 쓰신 게 아니라 제가 대신 쓴 겁니다. 표절을 했다면 제가 한 것이니 기사를 다시 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귀를 의심했다. ‘스승’을 위하는 마음은 갸륵했지만 이건 더 큰 문제여서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힘없이 고개 숙인 채 돌아가던 그 교수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세 번째 사례. 또 그 대학의 모교수가 모 언론사와 표절 논란을 벌였다. 그 언론사 기자가 ‘표절 킬러’ 소문을 들었다며 도움을 청해왔다. 선배 동료들을 동원한 압력에 너무 힘들다는 호소가 있었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다른 사례들에 비하면 그리 심각하지는 않지만 두 말할 것 없는 표절이었다. 그래서 기사를 썼다. 그런데 곧바로 전화가 왔다. 정정기사를 쓰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협박이었다. 함께 그 언론사 기자를 거든 진보성향의 한 주간지는 결국 그 협박에 굴복해 같은 분량의 정정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나는 협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송하라!” 그러나 결국 소송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 후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표절자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좋은 성과를 내는 학자들을 발굴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후로 표절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표절 자체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다.

표절은 무엇보다 양심(良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다. 사실 학자가 아닌 경우에는 조금 관대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엄격한 잣대로 보자면 그 또한 잘못이지만 겉치레 정도로 활용한다면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학자의 경우에는 아무리 엄격해도 지나치지 않다. 논문은 학자의 존재이유다. 그런데 논문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거나 어쩌다 쓴 논문이 표절 혐의를 받는다면 그 정도 여부를 떠나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새삼 인사청문회에서 표절 문제가 논란의 주요 핵심 사안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새 대통령이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중시될 수밖에 없다. 정치성향의 진보, 보수를 떠나 교수 출신이 표절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공직을 맡는 데 결격 사유가 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오랜 표절자 취재를 통해 얻은 경험이 하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두껍고 뻔뻔하다는 것이다. 하긴, 그러니까 표절을 하고 뒤에 발각돼도 대개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다 하는데 왜 재수 없이 걸린 나만 갖고 이러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았다. 남은 청문회에서도 이런 뻔뻔한 후보들을 보게 될 듯하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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