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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갈등 리포트] 개 도축시설 철거했지만…상인들 생계대책은 숙제로

입력
2017.04.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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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환경정비사업 추진에 찬성 16곳ㆍ반대 5곳 갈려

두달 전 상인회 자진철거에도 반대측 상인들 영업 계속

손님 줄자 찬성했던 상인도 염소장ㆍ토끼장 도로 내놔

“악취ㆍ잔인”주민들 민원 봇물

市 “장소 이전 지원 없다”단호

지난 14일 오후 찾은 경기 성남시 모란가축시장은 때마침 민속5일장(매달 4ㆍ9일)이 서는 날이지만 개고기를 취급하는 건강원과 도매상 등이 모인 ‘건강원 거리’는 한산했다. 상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가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지나는 사람을 멀뚱히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장날을 맞아 손님을 호객하며 왁자지껄한 민속장(5일장) 골목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지난 2월27일 성남시와 모란시장가축상인회의 협의에 따라 개 도축시설을 자진 철거한 이후의 풍경이다.

경기 성남시 모란가축시장의 한 상점에 내걸린 플래카드. 일부 상인들은 "오랜시간 영업을 해왔기에 업종 변경이 어렵고 도축시설 철거로 영업손실을 입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기 성남시 모란가축시장의 한 상점에 내걸린 플래카드. 일부 상인들은 "오랜시간 영업을 해왔기에 업종 변경이 어렵고 도축시설 철거로 영업손실을 입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장도 변해야” vs “개고기는 전통 먹거리”

모란가축시장은 국내 최대 개고기 유통시장이다. 점포마다 우리에 가둬둔 식용견 중 손님이 원하는 대상을 고르면 직접 도축해 보신탕용으로 손질해주거나 농축액으로 우려내 판매해왔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하나 둘 모여든 건강원 등이 골목 일대를 메워 2000년대 초반까지 54곳이 성업했지만 개고기를 찾는 이들이 줄어 현재는 22곳만 남았다. 지난해에는 이곳에서 하루 평균 220마리, 연평균 8만마리의 개가 팔렸다.

30여 년간 동고동락한 상인들은 지금 성남시의 환경정비 사업에 대해 찬성(16곳)과 반대(5곳), 유보(1곳)로 쪼개져 있다. 지난해부터 성남시가 시장 환경 개선에 나서면서 상인회와 협약해 ‘산 개’를 도축하는 시설을 자진 철거하고 업종 변환을 하는 등 변화에 나서면서다. 찬성 측 상인들은 이제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김용복(58) 모란시장가축상인회장은 “동물단체들의 항의가 거세 상인들로서도 어려움이 많았다"며 “시대에 맞게 전통장도 변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반대 측 상인들은 가축시장을 찾는 손님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축한 ‘산 개’를 원한다고 말한다. 도매상인 A(66)씨는 “가축시장을 찾는 손님들은 직접 보고 고르는 산 개를 원하는데, 누가 죽은 물건을 사러 모란시장까지 찾아 오겠느냐”며 “모란시장을 막는다고 개고기를 안 먹는 게 아니니 경기 외곽 도축장으로 수요가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상인들은 기자가 찾아간 날에도 산 개를 내놓고 팔고 있었다. 여전히 찬반 입장을 정하지 못한 이강춘(63)씨는 “30년 넘게 한 가지 일을 했는데 갑자기 업종을 바꿔 음식점을 하는 게 쉬운 일이겠느냐”며 “생계대책은 마련해주지 않고 도로정비나 해주는 게 무슨 대책이냐”고 되물었다. 도축시설 철거 이후 손님이 줄자 찬성 측 상인들도 시름이 깊어졌다. 한 상인은 “개장(개 우리)을 철거했다는 보도가 나간 후 장날인데 하루 한 마리도 팔지 못했을 만큼 영업 손실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철거에 찬성했던 상인도 염소장과 토끼장을 도로 내놓기도 했다.

모란가축시장의 한 건강원 앞에 개 우리가 나와있다. 성남시와 상인회의 도살시설 철거에 반대하는 상인들은 여전히 예전 방식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모란가축시장의 한 건강원 앞에 개 우리가 나와있다. 성남시와 상인회의 도살시설 철거에 반대하는 상인들은 여전히 예전 방식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수 십년 이어진 ‘개 식용’ 논쟁

개고기를 혐오하는 정서 때문에 모란시장이 위기에 처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알려지면 비난을 살 것을 우려한 정부가 모란시장을 두 달여간 폐쇄한 적이 있다. 34년째 이곳에서 건강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재욱(55)씨는 "올림픽 때는 정부가 막아도 개를 즐기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큰 타격은 없었다“며 “식용견과 애완견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고기가 지금처럼 혐오식품이 될 지 몰랐다”고 말했다.

변한 것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고기의 위치는 애매하다. 개는 축산법과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가축으로 분류되지만 축산물위생관리법이 적용되는 축산물은 아니다. 본래 소ㆍ돼지ㆍ닭 등 식용이 허용된 가축은 법에 따라 지정된 도축장에서 도축과 가공을 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개는 축산물이 아니니 규제를 받지 않는다. 도축과 유통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다. 개고기를 합법화하면 국제 정서상 비난이 일 것을 우려한 정부가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을 치를 때마다 전국의 개고기 유통시장이나 보신탕ㆍ영양탕집을 위생법관리위반 등으로 단속하며 ‘땜질식 처방’만 했을 뿐이다.

지난 14일 오후 경기 성남시 모란가축시장 초입에 '정상영업 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상인들은 개 도축시설 철거 이후 단골들로부터 "장사를 아직도 하느냐"는 문의가 많아 곤혹스럽다고 했다.
지난 14일 오후 경기 성남시 모란가축시장 초입에 '정상영업 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상인들은 개 도축시설 철거 이후 단골들로부터 "장사를 아직도 하느냐"는 문의가 많아 곤혹스럽다고 했다.

도시 발전하며 혐오시설로… 50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개를 먹느냐, 마느냐’는 해묵은 논의를 방치한 수 십년간 성남시는 빠른 속도로 도시화됐다. 성남시청 지역경제과 관계자는 “가축시장의 악취와 잔인한 도축 방법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불만도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며 “작년 7,8월에만 관련 민원이 700건이 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가 상인들의 영업을 규제할 법정 근거는 미흡하다. 그러다 보니, 성남시와 상인들간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한 상인은 “시가 개를 먹는 것까지 금지할 수 없으니 공무원들이 출근 도장 찍듯 반대 측 상인들을 찾아와 위생법 위반 등을 점검하고 있다”며 “허가 받은 사업장에서 꼬박꼬박 세금 내고 일했는데 하루 아침에 불법 딱지를 붙이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일부 상인들은 다른 곳으로 영업장소를 이전해주거나, 영업권을 보상해줄 것 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시의 입장은 단호하다. 성남시 전통시장현대화과 관계자는 “현재 성남시는 도축시설을 만들만한 부지가 없을 뿐 아니라 만약 시가 나서서 개 도축 시설을 만든다면 국제적인 비난거리가 되지 않겠느냐”며 “상인들을 잘 설득하고 협의해 장기적으로 염소나 토끼 등도 도축하지 않고 모란시장이 현대화된 모습으로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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