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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개천절의 뿌리

입력
2014.10.0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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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시작을 하화족(夏華族)과 동이족(東夷族)의 싸움으로 그리고 있다. <사기> ‘오제(五帝) 본기’의 첫머리가 하화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와 동이족의 시조인 치우(蚩尤)와의 다툼으로 시작한다. 그 중 “치우가 가장 포악했지만 정벌하지 못했다(蚩尤最爲暴, 莫能伐)”는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치우가 어떤 인물인지 잘 드러난다. 먼저 <사기 집해(集解)>에서 응소(應?)는 “치우(蚩尤)는 옛날 천자(古天子)이다”라고 설명했다. 응소는 2세기 무렵 태산태수(泰山太守) 등을 역임했던 후한(後漢)의 학자인데, 그가 치우를 ‘옛 천자’라고 본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기에 대한 또 다른 주석서인 <사기 정의(正義)>에서 공안국(孔安國)은 “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蚩尤)이다”라고 설명했다. 전한(前漢) 때의 인물 공안국은 공자(孔子)의 11세손(世孫)이다. 한나라 경제(景帝ㆍ재위 서기 전 156~141년)의 아들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던 궁실을 확장하기 위해서 궁실 안에 있는 공자의 옛 집을 헐었는데, 그 벽속에서 <효경> <춘추> <논어> <서경> 등이 나왔다. 그러나 옛 고문인 과두문(??文)으로 되어 있어서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다. 이때 <금문상서(今文尙書)>를 배웠던 공안국이 금문으로 해독하고 <서전(書傳)>을 만들어 사마천에게 가르쳤다. 이 정도로 고전에 능했던 공안국이 치우를 동이족의 한 갈래인 구려(九黎) 임금으로 본 것이다. <사기 정의(正義)>는 또 <용어하도(龍魚河圖)>를 인용해서 “황제(黃帝)가 섭정(攝政)할 때 치우(蚩尤)는 형제 81인이 있었는데…칼과 창과 큰 활 같은 병기를 만들어 세워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동이족 치우 족속이 이미 금속문명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용어하도(龍魚河圖)>는 또 “만민(萬民)이 황제(黃帝)가 명령을 내려 천자(天子)의 일을 행하기를 바랐지만 황제는 인의로써 치우를 금지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 민족의 시각으로 쓰여진 이런 기록들에 의하더라도 치우족속은 황제족속보다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사기 정의(正義)>는 또 <산해경>을 인용해 “황제가 응룡(應龍)에게 명령해 치우를 공격하게 했다.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불러 따르게 하니 큰비와 바람이 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 ‘왕검 조선’조에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고 전한 것과 부합하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단군을 일연이 창작한 인물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247년)’조는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대지(宅)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인데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이 재위 15년(427년) 천도했던 지금의 평양과는 다른 곳으로 요동에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인 왕검은 물론 단군왕검을 뜻하는 것이니 일연이 창작했다는 주장 자체가 우리 민족의 시조를 부인하려는 악의적 왜곡의 소산이다. 고구려 동천왕은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략으로 위기를 겪은 후 시조 단군의 가호로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단군왕검의 수도였던 평양성으로 천도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 과거에 급제해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유학자(儒學者) 나철(羅喆ㆍ1863~1916년)이 나라가 쇠퇴한 원인을 유학의 중화 사대주의에서 찾고는 단군교, 즉 대종교(大倧敎)를 창건한 것도 마찬가지 인식이다. 초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대종교는 1909년부터 음력 10월 3일을 나라가 시작한 날로 기념해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이미 개천절을 국경일로 기념해왔다. 일제에게 극심한 탄압을 받던 대종교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 3일 전국 각지에서 감격적인 개천절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오전 6시 대종교 천진전(天眞殿)에서 마라톤 선수 함기용(咸基鎔)에게 성화(聖火)를 전하는 성화 전수식을 거행했고, 이 성화는 당시 민정장관이었던 민세 안재홍(安在鴻)에게 건네져 정오에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에 불길이 타올랐다(<대종교 중광 60년사> 1971년) 함기용은 이 기세를 몰아 1950년 제54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1949년부터는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개천절을 거행해 왔지만 형식에 그친 감이 없지 않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제헌절 노래를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대한민국 억만년의 터”라고 노래한 것은 우리 민족은 물론 우리 헌법도 개천(開天)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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