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반파시즘 세계연대… 국제여단이 일깨운 것

알림

반파시즘 세계연대… 국제여단이 일깨운 것

입력
2014.12.15 13:58
0 0

민주세력 vs 파시즘 대결의 장

1936년 총선서 좌파정권 들어서자 독일, 프랑스 지원받은 군부쿠데타 감행

유럽 좌파 중심 국제여단 편성 맞불

국제여단 지휘부.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제여단 지휘부. 한국일보 자료사진

1936년 가을 밤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몰래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에서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에 도착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스페인에 들어간 이들은 군부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스페인 공화정부 편에 서서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세계 각지의 50개국에서 온 젊은이 3만2,000명이 자원해서 전투에 나섰고, 역사는 이들을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유럽이 근대화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갈 때 스페인은 봉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대지주, 가톨릭 교회, 군부가 스페인의 권력을 독점했다. 권력을 틀어쥔 교회 자체가 최대 지주였으며, 가진 자만 받아들이고 가난뱅이는 멀리했다. 군부는 왕정을 옹호하는 수구 세력이었다. 땅 한 뙈기 가지지 못한 농민 대다수는 지주의 수탈에 시달렸다. 산업화에 따라 성장하는 노동 계급과 더불어 농민들이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

우익 전선, 중도 세력, 인민 전선의 3파전으로 치러진 1936년 2월 총선거에서 인민 전선이 승리했고 억눌려 왔던 민중의 힘이 분출했다. 노동자는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은 지주의 토지를 점거했다. 기득권층에게 이러한 사태는 국가의 기틀이 무너지는 꼴로 보였다.

날아온 총알에 병사가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해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보여준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작품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날아온 총알에 병사가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해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보여준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작품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특권 지배층과 깨어난 민중의 대결

스페인령 모로코에 있던 프랑코 장군이 그 해 7월에 쿠데타를 선언했고, 스페인 본토의 군 지휘관들이 호응해서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모로코에 있던 반란군 주력은 파시즘 국가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해협을 건너 본토에 상륙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병력까지 투입해서 프랑코 장군을 도왔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두 파시즘 국가는 협약을 맺었고 결국은 로마-베를린 추축이 탄생했다. 위기를 느낀 유럽의 좌익 세력은 스페인 공화정부를 돕고자 나섰다. 그러나 히틀러를 자극할까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고수했고, 소련만 합법 정부에 원조 물자와 군사고문단을 보냈다.

반란군은 수도 마드리드를 거머쥐려고 파상 공세를 가했지만, 마드리드 시민과 국제여단의 저항에 밀려 점령에 실패했다. 프랑코는 마드리드 공략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을 점령하는 데 치중하면서 스페인은 장기 내전의 불길에 휩싸였다.

스페인 공화국 군인 폰스 프라데스는 1937년 여름에 라 만차에서 정부가 징집한 농부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징집된 농부는 “모두 키가 작고 구부정한 중년으로 얼굴은 햇볕과 바람에 검게 그을려 주름져 있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는 그들은 훈련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프라데스는 말했다. “여러분이 이 전쟁에서 이기면 땅이 전체 마을사람 것이 됩니다. 가난하다면 다 같이 가난하고 잘 산다면 다같이 잘 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고 죽는 이유입니다.” 이후 농부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이처럼 스페인 내전은 특권을 누려온 지배층과 깨어난 민중의 한판 대결이었다.

국제여단 영국인 병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제여단 영국인 병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스페인 내전은 실은 유럽 내전

반란의 핵심은 파시즘을 표방하는 팔랑헤 당이었으며,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내전에 깊이 개입해 민주 정부를 옥죄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민주 세력과 파시즘 세력 사이에 벌어진 유럽 내전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 공화정부의 승리는 유럽 반파시즘 전선의 승리와 동일시되었다. 이런 신념을 지니고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들어가 국제여단으로 편성되었다.

더군다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선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주의자에게 국제여단에 참여해 벌이는 투쟁은 조국을 파시즘의 마수에서 구해내는 싸움이기도 했다. 한 독일 공산주의자는 “이것은 스페인인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인 국제여단원들은 “마드리드를 거쳐 로마로 간다”는 구호를 외쳤다. 실제로 국제여단의 이탈리아 연대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프랑코 편에 선 조국의 파시스트 부대를 쳐부쉈다.

회고록을 남긴 국제여단원은 주로 문필가였고, 지식인 국제여단원은 여론의 각광을 받았다. 국제여단원이었던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 로버트 조던의 모델로 알려진 국제여단원 로버트 메리먼은 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조교였다. 이런 이유로 지식인들이 국제여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인상이 생겨났다.

그러나 실제로 국제여단의 대다수는 노동계급 젊은이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 국제여단원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자의 비율이 높았다. 또한 국제여단에는 유대인이 꽤 많았고, 100명을 밑돌았지만 흑인도 있었다.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에서는 얼마간 선전 효과를 노리고 흑인을 지휘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스페인에서 벌어진 것이다.

국제여단, 전황 돌이키기에는 역부족

국제여단원은 이상주의자이기에 앞서 총을 들고 싸우는 군인이었다. 사기는 높았지만 그들은 아마추어였다. 일부가 품었을 낭만적 모험심이 산산조각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제여단원이었던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찬가’에서 “정의의 편에 섰다는 의식은 사기를 높일 수 있다…그러나 자연의 법칙이 반혁명군보다 혁명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썼다.

국제여단의 피해는 극심했다. 전투 투입 석 달 만에 영국인 국제여단원 600명 가운데 400명이 전사했다. 반란군은 직업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에게서 얻은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 미국인 연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격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말 그대로 명령을 수행하다가 단일 전투에서만 400명 중 298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봤다. 1937년 1월에 제11 국제여단이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을 때, 2,000명이던 병력은 600명으로 줄어 있었다.

국제여단원을 괴롭히는 것은 전장의 총알뿐이 아니었다. 거친 자연을 이겨내야 하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공포, 부상, 물자 부족이 일상사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어 언어장벽도 늘 문제였다. 1936년 말 제14 국제여단 소속 한 연대에서는 9개 언어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트로츠키주의자를 색출한다며 모스크바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를 찾느라 눈을 번뜩이는 소련 비밀경찰이 늘 국제여단원을 노렸다.

공산주의 세력과 아나키즘 세력이 갈등하면서 스페인 공화정부는 사분오열되었다. 더군다나 영국과 프랑스가 뒷짐 지고 있는 사이 파시즘 세력은 활개를 쳤다. 이러니 국제여단이 열심히 싸워도 전황은 불리해져만 갔다. 1938년 프랑코 반란군이 테루엘을 거머쥐면서 공화정부가 차지한 지역이 두 동강나는 형국을 맞았다. 아나키스트의 아성 카탈루냐마저 반란군에게 빼앗기면서 공화국의 패색이 짙어갔다.

1938년 9월 국제연맹 총회에서 스페인의 네그린 총리는 “스페인 정부는 정부 편에 서서 전투를 벌이는 비스페인인 전투부대를 즉시 완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로 국제여단원은 차례차례 스페인을 떠났다. 1938년 10월 말 바르셀로나에서 마지막 국제여단 열병식을 지켜본 뉴욕타임스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이들은 열병을 배우기에 앞서 싸우는 법을 배웠다. 산뜻한 군복을 입지도 않았고, 무기도 없었으며, 줄도 발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본 모든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과 함께 싸운 사람은 이들이 진정한 군인임을 알고 있었다.”

국제여단 소속 조종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제여단 소속 조종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택 피하지 않는 자가 역사 만든다

1939년 2월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고, 3월 말에 프랑코 장군이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합헌 정부를 반란으로 뒤엎은 프랑코는 1975년에 죽을 때까지 36년 동안 스페인을 독재로 옭아맸다.

영국인 국제여단원 로리 리는 “스페인에서 싸우다 죽은 이는 행운아”라고 한탄했다. 스페인을 떠난 국제여단원이 맞은 모진 운명 때문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 국제여단원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동포에게서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후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미국인 국제여단을 공산주의의 “봉”으로 멸시했다. 프랑스로 간 국제여단원은 곧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피하지 못하고 비시 정권 하에서 독일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아야 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소련인 군사고문관을 기다리던 것은 숙청이었다.

국제여단의 투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국제여단을 연구한 버렐 존스턴은 차갑기 이를 데 없는 평가를 내린다. “불행히도 그들의 이상주의와 자기희생은 싸움을 연장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파리와 런던의 ‘불간섭’ 정책을 고려하면, 스페인을 위한 최선의 결과는 내전을 초기에 끝내는 것이었다.”

국제여단은 무엇보다 전투 부대였고, 그 점에서 그들은 패배자였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국제여단원은 격동의 세기에서 가치판단을 했고, 그에 따라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에 따른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념에 어울리게 총을 들고,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가까워진 동지와 함께 내달렸으며, 때로 그 동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 자신도 전장에서 쓰러졌다. 시대는 선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 선택을 피하지 않는 자가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국제여단은 교훈을 일깨워주었고, 그래서 역사는 그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ㆍ유럽현대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