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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만인의 집” 난민을 품은 예수

입력
2018.06.30 10:00
수정
2018.07.04 13:3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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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유대인ㆍ타민족 담 허문 예수 통해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 될 수 있다”

성서는 이방인 포용할 것 가르쳐

지금의 난민 같은 ‘도망자’ 문제

우선 구제 후 판결했던 것처럼

외면보다 관대한 태도가 필요

제주출입국ㆍ외국인청 강당에 모인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한국 생활에 대해 안내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주출입국ㆍ외국인청 강당에 모인 예멘 난민 신청자들이 한국 생활에 대해 안내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 대 이탈리아 전을 영국에서 보았다. 대학 앞에 있는 펍(pub)에서 보았는데, 그 곳에는 한 무리의 이탈리아 학생들이 있었고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있었다.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설기현의 동점 골까지는 자중했지만, 안정환의 골든 골이 터지자 나는 튕겨져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과 네덜란드인이었던 내 두 친구가 조심스럽게 나보고 나가자고 했다. 앞에 있던 이탈리아 친구들이 통곡에 가깝게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단골 이발사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는데, 그의 가게는 온통 이탈리라 축구 선수 화보로 가득하다. 이탈리아 전이 있고 며칠 후, 생각 없이 그 이발소를 갔는데 아차 싶었다. 평소에 그렇게나 수다를 떨던 그 이발사가 싸늘할 정도로 말없이 이발을 했다. 가위가 내 귀를 스칠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 골든 골 이후 안정환이 자기 소속팀이 있는 이탈리아에 안전의 문제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도, 그 나라에서는 그리 의아할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축구가 종교라는 말도 그리 놀랍지 않기 때문이다.

축구는 전쟁이다

유럽에서는 오랜 역사 동안 다양한 민족적 지역적 전쟁이 끊임없이 있어왔다. 축구는 사실 그들이 늘 해오던 전쟁의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유럽의 전쟁과 축구는 그 뿌리가 같다고들 말한다. 소위 ‘종족주의(tribalism)’가 그 근간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축구팀은 어느 특정 도시나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자기가 응원하는 축구팀은 주로 자기가 자라난 고향 소속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자신의 혈족이나 지역이 자극 받으면, 같은 집단의 사람들은 온몸에 피가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이들은 그와 같이 전쟁을 치렀었고 축구도 해왔다.

그래서 유럽의 축구에는 지독한 인종차별, 민족주의, 지역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이 마치 사춘기 때 호르몬처럼 분출된다. 죄 없는 우리나라 가수 싸이가 이탈리아 축구 어느 더비 전에 초대되어 노래 부르다가 관중들로부터 지속적인 야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너무나도 엄중한 그들의 전쟁 의식에 동양 가수가 와서 댄스 곡을 부르니, 그들 입장에서는 불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그날 경찰들은 각 팀 서포터들로부터 불법 무기들을 다수 압수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축구는 전쟁과 마찬가지다.

사실 인간은 매우 본능적으로 자기와 같은 인종이나 민족, 지역에 큰 동질감을 느낀다. 다소 배타적이고 수구적인 것에 안정감을 느끼기 마련이며, 이질적인 것은 적대시 한다. 유럽은 오랜 기간 그런 갈등과 분쟁의 홍역을 크게 치러왔다. 십자군 전쟁이나 나치의 홀로코스트, 두 차례에 걸친 대전은 치열한 종족주의의 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종교마저 한 요소가 되었을 때, 그 경험은 거의 악마적인 재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자기들의 지독한 종족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겨오기도 했다. 이상적 평화와 안녕을 위해 매우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펴왔으며, 수많은 이민자와 난민을 위한 관용과 개방의 처소가 되어왔다.

벨기에 대표, 콩고 출신 루카쿠

그래서 멋진 흑인 선수 로멜로 루카쿠가 벨기에 국가대표며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표 골잡이를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이다. 골을 넣을 때마다 흑인과 백인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이 이제는 유럽에서 전혀 낯설지가 않다. 가장 격렬한 종족주의의 온상이었지만, 이제는 인도주의적 이민정책을 펴는 곳이 유럽이기도 하다.

타 인종과 민족에 대한 인도주의적 가치관은 성서와 기독교가 제시하는 고귀한 가치이다. 종족주의에서 만민보편주의로의 대전환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바로 성서의 맥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라는 구약의 종족주의가 물러나고, 혈통과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든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신약의 보편주의가 도래한 것이 성서의 큰 맥이다.

이미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여려 차례 지독한 민족주의를 질타했다.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했을 때, 무지막지한 반이방주의 운동으로 수많은 다문화 가정들이 생이별을 했었다. 이때를 배경으로 이사야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되었다. “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이사야 56:3-7)

신약 시대 이후 기독교가 태동하여서는, 예수의 출현이 유대인과 타민족 사이 막힌 담을 무너뜨린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에베소서 2:14-15) 고통의 ‘십자가’가 곧 민족 간의 ‘평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혼 구원만이 기독교의 모토가 아니다. 매우 사회적인 평화의 복음도 교회를 통해 선포되어야만 한다.

이미 유럽에서는 경험된 바 있는 일이지만, 한국은 근간에 이르러 난민 문제를 겪고 있다. 상황은 그리 쉽지 않다. 어느 나라든 그들의 경제 상황이 이민자나 난민들에 대한 태도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업률이 높은 국가 일수록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 범죄가 증가한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은 난민들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콩고 출신 축구선수 로멜로 루카쿠. 그는 벨기에 대표팀 주전 선수이자 영국 프로팀 맨체스터 유나티드의 공격수다. 인종주의, 민족주의에 얼룩졌다는 유럽 축구계도 이렇게 변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콩고 출신 축구선수 로멜로 루카쿠. 그는 벨기에 대표팀 주전 선수이자 영국 프로팀 맨체스터 유나티드의 공격수다. 인종주의, 민족주의에 얼룩졌다는 유럽 축구계도 이렇게 변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약은 난민을 품는다

성서와 기독교는 인간 사회의 본능적 배타성을 무너뜨리고 인도적 가치를 위해 타인과 이방인을 포용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배타적이라 하여도, 교회만큼은 절대로 사람간의 ‘막힌 담을 무너뜨렸던 십자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잊는 정도가 아니라, 난민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부담마저도 교회가 적극적으로 떠안겠다는 사명을 지녀야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와 교회가 진정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생긴 것이다. 도리어 교회가 앞장서서 이슬람 포비아나 난민 혐오를 양성한다면, 이는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다.

성서의 도피성 제도를 살펴보면, 지금의 난민과 같은 ‘도망자’ 문제를 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수용하고 처리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에 살인을 저지를 사람은 고의든 실수든 상관없이 죽은 사람의 친족에게 걸리면 끝장난다. 재판도 없이 보복 살인이 가능하던 때였다. 그래서 도피성 제도는, 긴박한 위협 아래에 있는 도망자는 우선 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보호부터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가 보호하려는 난민은 휴가 차 한국에 온 외국 관광객이 아니다. 전쟁이나 재앙으로 인해 그 삶이 긴박한 위협을 받는 도망자들이다.

우선은 구제한 후 그들을 회중 앞에서 구체적인 ‘심사’를 한다. 도망 오면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민수기 35:12) 판결 이후에는 살인자의 고의성이 발견되면 그를 도피성 밖으로 넘겨주기도 했다.

오랜 영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영국 미디어는 당시 긴장된 한반도 정세를 자주 보도했었다. 같이 2002 월드컵을 보았던 독일과 네덜란드 친구가 나에게 너무나 진지하게 영국으로 난민 신청을 해보라고 권고했다. 황당하다 못해 박장대소를 했지만, 유럽인 친구로서 그들은 진정으로 나를 염려했던 것 같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애굽기 22:21) 지금 우리 사회가 외면하는 난민들이 바로 나와 당신의 처지가 되지 않으라는 법이 있을까? 유색인종이면서 유독 서구 선진사회에 가서 살기 좋아하는 일부 한국인들은, 적어도 난민 문제만큼은 관대하기를 바란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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