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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양보 없인 ‘비정규직 제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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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양보 없인 ‘비정규직 제로’없다

입력
2017.09.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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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무한정 예산 쓸 수 없는데

정규직은 처우 악화 우려해 반발

공공기관 곳곳 진전 없이 한숨

1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원들이 근속수당 인상 및 교육부장관·교육감 직접 교섭을 촉구하며 집단 삭발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원들이 근속수당 인상 및 교육부장관·교육감 직접 교섭을 촉구하며 집단 삭발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지 두 달이 흘렀지만 야심 찬 출발과 달리 진척은 더디다. 곳곳에서 갈등과 마찰이 빚어지고 장벽에 부딪치면서 해당 기관 담당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기존 정규직들의 견제와 물음표 가득한 가이드라인, 정부 부처들의 답답한 소통이 뚫리지 않는다면 ‘노동 존중’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거대한 실험이 좌초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①정규직 파이 축소 없인 해답 없다

19일 오전 서울정부청사 앞 바닥에는 새까만 머리카락들이 떨어졌다. 급식 조리원 등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속수당 인상을 놓고 지난달부터 교육 당국과 교섭에 나섰지만 파행을 겪으면서 교섭 촉구를 위한 삭발식을 감행한 것이다. 2013년부터 이들 대부분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고용 안정’을 얻었지만, 임금이 정규직의 60% 수준에 그쳐 그동안 처우개선의 목소리가 높았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교육당국은 향후 최저임금 인상 등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을 내걸며 교섭을 지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교 비정규직 사례는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의 밝지 않은 미래를 보여준다. 정부가 정규직 전환에 무한정 예산을 쏟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과 향후 처우개선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 정규직의 양보가 필수조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7월 가이드라인 발표 당시 ‘재정 부담 최소화’ 원칙과 함께 ‘정규직의 연대’를 당부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규직들의 저항이 거세다. 지난 7월 서울시가 투자 출연기관 11곳의 무기계약직 2,442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발표 이후 무기계약직의 규모가 가장 큰 서울교통공사의 입사 3년차 안팎의 젊은 정규직 400여명은 사내 온라인 게시판과 집회 등에서 거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입사 2년차 정규직 A씨는 “입사 절차와 업무 영역이 다른데 결과의 평등을 위해 서울시가 공정한 절차 없이 일괄적으로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며 “적자가 심하고 서울시의 예산 투입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국 향후 구조조정 등 기존 구성원들의 처우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규직 전환 대상 심의 과정에서도 이런 현상은 고스란히 노출된다. 민주노총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정책실장은 “현재 간접고용 비정규직들의 전환 심의에 참여 중인 정규직 중 일부는 자신들이 속한 모회사에 타격을 주지 않는 자회사 고용방식을 주장하거나 아예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라며 “정부가 확실한 신호를 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들도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 제로’가 실현되려면 일정 부분 정규직의 양보가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남신 한국비정규센터 소장은 “성급한 정규직화 추진으로 하향 평준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정규직 노조가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 나오고 있다”며 “정부도 한정된 예산에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마술 같은 해법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국민 대토론회 등 사회적 합의를 위한 장을 만들어 정규직 양보의 필요성을 쟁점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추진 일지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추진 일지

②가이드라인 구체화해야 갈등 줄인다

최근 강원지역 한 시청에서는 정규직 전환대상 여부를 놓고 사측과 노동자간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청의 재활용품 선별 및 소각 작업을 맡고 있는 60명의 용역 근로자들은 11월말이면 계약기간 3년이 종료되는데, 시청 측은 이들과 재계약을 맺지 않고 지난 11일 경쟁입찰 공고를 냈다. 노조 관계자는 “명백히 용역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으로 올해 전환 심의를 해야 할 1단계 대상자”라며 “정부 지침대로라면 계약을 일시 연장하고 정규직 전환 여부를 심의해야 하지만 아예 배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시청 관계자는 “해당 업무는 민간위탁업무로 규정돼 있어 내년에 본격 논의가 될 3단계 전환대상”이라며 “3단계 대상자는 아직 전환 기준이 확립되지 않아 지금 입찰 공고를 내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정부가 두 달 전인 7월20일 내놓은 가이드라인을 두고 현장에서는 너무 애매모호하다는 지적들이 쏟아진다. 정부는 가이드라인의 특성상 전환을 돕기 위한 대원칙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수많은 사각지대를 만드는 것이 현장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정규직 전환 예외조항을 몇 가지 제시하긴 했지만 이런 조항에 해당되지 않은 다양한 사례들 역시 갈등의 빌미가 되고 있다. 한 지방자치단체 출연 의료원은 기간제 근로자로 주차관리 등을 담당하던 장애인 6명과 지난 13일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 6명의 장애인을 채용했다. 노조 측은 ▦연중 9개월 이상 ▦향후 2년 이상 상시 지속적 업무라는 대원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측은 장애인 일자리 고용을 위해 불필요한 일자리를 추가적으로 만든 것인데 이들마저 정규직 전환 대상으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이다.

이상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각 기관의 특성이 너무 다양해 정부로서도 다양한 유형을 일일이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라면서도 “그렇지만 하반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라도 유사한 기관별로 문의사항을 묶어 자료를 배포하거나 정부 지원 컨설팅팀의 노하우 등을 공유하는 대처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③정부 일방통행식 소통 없애야 괴리 줄인다

현장 혼란은 가중되고 있지만 정부의 소통 방식은 답답하기만 하다. 관련 문의가 빗발치는데도 일방향식 소통으로 현장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의 한 공공기관은 최근 행정 보조 업무 두 자리를 공석으로 뒀다. 기간제와 파견 근로자였던 이들의 계약기간이 끝났지만 정부 방침대로 정규직 전환 심사를 위해 고용을 연장하면 현행법상 무기계약직으로 고용해야 하는 상황이 돼 이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기관 관계자는 “전환 관련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달 컨설팅을 신청했고 선정기관을 발표 한다는 시점이 2주가 넘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공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지침도 일방적으로 하달만 될 뿐이어서 현장과는 따로 움직인다.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면서 정규직 전환의 시험대에 오른 인천공항공사는 최근 진통 끝에 노ㆍ사 전문가 협의회를 출범하며 두 차례 회의를 가졌지만 공사가 정부에 제출한 비정규직 실태조사 보고서 공개 여부를 놓고 노사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실태조사 자료는 협의 과정에서 기초자료로 제공하라”는 것이 고용부의 지침이지만, 정작 사측은 이를 무시한 채 보안 등 석연찮은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 지침과 현장에서의 얘기가 괴리를 보이지 않도록 정부가 소통과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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