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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엿 같은 기분

입력
2017.10.27 14:5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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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사람이 많이 몰리는 퇴근시간 무렵, 두 개의 노선이 만나는 지하철 환승역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한 손에 우유를 다른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하던, 대기 줄 맨 앞의 젊은 여성은 목소리만으로 심상찮은 존재감을 뿜뿜 과시하는 중이었다. 열차 도착 알림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로 만원인 열차 안보다는 바깥쪽이 통화하기 낫다고 생각했을까? 떡 버티고 선 채 통화를 이어가는 여성으로 인해 한 순간 대기 줄에 정체가 생겼다. 상황을 감지한 나와 몇몇 사람이 옆문으로 이동해 열차에 오르고, 그 젊은이 바로 뒤에 선 채 우물쭈물하던 노인이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리를 절며 서너 걸음 옮기던 노인이 젊은이를 향해 신경질적인 한 마디를 했다. “이 아가씨야, 그렇게 문을 막고 섰으면 어떡해. 세상 눈치 좀 보며 살란 말이야.”

사단이 일어났다. 여성이 문 닫히기 직전 열차에 번개같이 오르더니 사람들을 헤집고 노인이 앉은 자리로 왔다. “그 말, 다시 해봐요. 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노인은 이 무슨 횡액인가 싶은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다보기만 했다. “나이 먹었으면 나잇값이나 똑바로 하든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래라 저래라 반말로 훈계질이에요?” 거침이 없었다. 고요한 열차 안에서,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과 위세대의 허다한 언어폭력까지 함께 묶어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하는 젊은이의 항변은 흡사 웅변대회 연단에 선 연사의 클라이맥스처럼 크고 또렷하게 울렸다. 30초가량 자신의 소견을 쏟아낸 그는, 노인에게 반말과 무례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반말로 화를 낸 내 무례를 사과하리다. 하지만 이렇게 나이 먹고 불편한 몸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개인적인 처지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젊은이에게 당부의 한 마디를 전할 요량이던 노인의 의도는 거기서 또 한 번 좌절됐다. “됐고요, 앞으로 말조심하세요. 나이 먹은 사람들이 그렇게 반말로 찍찍 훈계질 해대면, 듣는 사람 기분이 얼마나 엿 같은지 알기나 해요?”

여성은 이만하면 ‘엿 같은 기분’을 충분히 어필했다고 판단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쭉쭉 빨며 왔던 쪽으로 사라졌다. 그 기세에 눌린 탓일 수도,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의 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일 수도, 그도 아니면 나와 같은 방관자의 태도일 수도 있었다. 차 안에 있던 모든 이의 눈길이 이 광경에 쏠렸지만, 어느 누구도 상황을 중재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다만 여성이 사라지고 난 뒤 옆자리에 앉았던 낯선 중년 여성이 가방 안의 물병을 쥐어주며 노인의 등을 두어 번 쓸었을 뿐.

나는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다. 친구를 만나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안 좋았다.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와 무릎 위에서 쉼 없이 떨리던 노인의 쇠잔한 손등이 자꾸만 떠올랐다. 관찰자로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 나의 비겁함 때문에 이토록 불편한 걸까. 설령 개입을 했다면 나는 어떤 시각으로, 어떤 말과 행동으로 끼어들어야 했던 걸까.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며 친구에게 지하철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개운하지 않은 내 마음도 더불어 털어놓았다.

한숨을 내뿜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착종이지. 사유의 착종, 감정의 착종. 모든 게 뒤섞인 채 각자 유리한 것들만 끌어들여 제 목소리를 높이다 보니 세상이 점점 이상하고 소란스럽게 변하는 거야.” 아마도 지금 내가 편치 않은 건, 이런 현실을 선뜻 인정하기 싫어서일 거라고 친구는 말했다.

깊어가는 가을밤을 낭만적으로 즐기자며 만난 건데, 가라앉은 마음은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딱 엿 같은 기분. 그렇게 우리는 쓴 커피만 마셨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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