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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극장이 없다는 것

입력
2016.06.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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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태백산맥'이 상영 중인 서울 종로구 단성사 앞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단성사는 지난해 한 기업에 경매로 팔리면서 100년 넘게 이어온 영화와의 인연을 끊게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4년 '태백산맥'이 상영 중인 서울 종로구 단성사 앞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단성사는 지난해 한 기업에 경매로 팔리면서 100년 넘게 이어온 영화와의 인연을 끊게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낯선 곳에 가면 되살아나는 버릇이 있다. 거리를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다 극장이 눈에 들어오면 가던 길을 멈추곤 한다. 오래된 극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영화를 상영할 때는 행선지를 잊고 당장이라도 들어가고픈 마음이다. 해외에서 거리를 거닐 때 이 증상은 심하게 나타난다. 어느 도시를 추억할 때는 야경이나 음식, 근사한 건축뿐 아니라 극장에서 느꼈던 낭만까지 떠올린다.

운 좋게도 세계 여러 곳의 극장들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문 연 지 100년이 넘은 영국의 한 극장에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제3세계 영화들을 여럿 본 추억이 짙고, 한국의 멀티플렉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 극장에서 인스턴트 음식 같은 상업영화를 본, 별스럽지 않은 기억도 꽤 된다.

가장 인상적인 극장을 꼽으라면 캐나다 토론토의 윈터가든 극장이다. 토론토 도심에 놓인 이 극장은 1913년 문을 열었다. 영국 에드워드 시대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극장이다. 인공과 자연 덩굴나무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어 숲 속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추운 겨울날에도 숲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해서 극장 이름이 ‘겨울 정원’인 듯하다. 1928년 문을 닫았던 이 극장은 복원 공사를 통해 1989년 원형을 되찾은 뒤 재개관했다.

온전한 복원을 위해 미국 시카고의 바이오그래프 극장에서 20세기 초반 북미 극장들이 쓰던 의자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1930년대 미국 사회를 흔들었던 악명 놓은 갱단 두목 존 딜린저가 마지막으로 앉았던 의자도 포함됐다. 딜린저는 1934년 7월 어느 날 밤 영화를 본 뒤 바이오그래프 극장 밖에서 경찰에 사살됐다. 지은 지 100년 넘은 윈터가든 극장이 복원 과정에서 으스스한 사연까지 더한 셈이다. 윈터가든 극장은 딜린저의 유령이 극장 안을 떠돈다는 괴담을 호객에 활용하고 있다. 오래된 공간이 무릇 그렇듯 오래된 극장은 여러 사연을 품는다. 스크린 밖 역사가 영화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난 2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영화박물관 설립 추진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에 참석한 변재란 순천향대 영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 “단성사 같은 옛 극장이 있었으면 박물관으로 활용하기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1907년 국내 최초의 상설 상영관으로 지어진 단성사는 옛 건물을 허물고 2005년 멀티플렉스로 전환했으나 지난해 한 기업에 사무용으로 팔리면서 극장으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고색창연까지는 아니어도 10년 안팎의 시간 동안 관객을 맞이했던 작은 극장들도 문을 닫고 있다. 지난해 서울 소격동 예술영화전용관 씨네코드 선재가 간판을 내렸고, 지난달 서울 태평로의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이 폐관했다. 관객의 사연이 스며 있던 공간들이 사라진 것이다. 오래된 문화공간에서 추억을 되새기며 새 영화를 맛보는 기분은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시장의 법칙을 거역할 수 없다지만 오래된 극장의 퇴장은 아쉽고 쓸쓸하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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